숙희가 몸을 돌려서 운진의 상반신을 은근히 눌렀다.
"나는 자기네 엄마가 나한테도 육두문자 쓰는 바람에 실망... 그래, 아니, 서운했지만. 자기는 울 엄마한테 물벼락을 몇차례 맞았잖니. 그 말을 듣고 내가 어땠겠어. 자기 자존심 유난히 쎈 거 내가 아는데..."
운진이 숙희의 어깨를 슬쩍 미는 시늉을 했다. "날 당신 엄마 보는 앞에서 쳐서 넘어지게 한 건 기억 안 나나부지?"
"오호호! 사실은 그 때... 엄마가 좀 주춤하더라? 나중에 나보고 꼭 그래야 했느냐며."
"통쾌하셨나부지."
"통쾌는 내가 했지!"
숙희가 운진의 볼에다 볼을 비볐다. "참 착한 남자구나. 내가 좀 망나니 같은 기질을 못 고치고, 화 난다고 발로 찼는데, 그냥 돌아서서 가던 남자... 다른 남자들 같았으면 아마 같이 치고받고 했을래나?"
"헤헤헤. 볼만 했겠군. 여자랑 치고받고 싸워..."
"그랬다가 자기와 이십년 만에 처음 통화를 했잖아?"
"변호사비 때문에."
"그 때두 자기 삐쳐갖고는 전화를 탁 끊더라구."
"..."
"어찌나 황당하던지. 와하하! 이 남자 아직도 삐치는 거 하네?"
"나 원..."
운진은 그래도 새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가셔지지 않고 아직도 불안하다.
이십년을 속에다 품고 지내온 이야기를 부드러운 분위기로 풀어나가지만 언제 또 무슨 일로 곤란한 경우를 만날지... 앞일은 아무도 예측을 못한다. "당신이 먼저 딱딱하게 했구마는."
"자기! 그러면 이십년 만에 자기가 전화를 걸어서, 아, 예, 오운진입니다, 하는데, 뭐라고 하냐? 어머어! 오 선생님! 오랜만이예요!... 이래? 아니면 너 미쳤냐 하면서 확 끊어?"
"차라리 너 미쳤냐, 하는 게 더 현실적이었지."
"참 나... 내 딴에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좋게 말하려고 애썼구마는... 자기가 내 입장 되어봐라. 자기, 은근히 나 기분 나쁘게 만든다?"
"어, 또. 잘 나가시다가 갑자기 왜 그러시나."
운진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왕년의 대숙희씨가 가슴이 떨리셨어요? 하하하!"
"그래. 웃자. 이제는 웃어도 되니까? 그나저나 그 때 변호사비 이제 받은 셈이네?"
"어? 줬는데? 설이 편으로? 못 받았소?"
"그 때 살인미수 껀의 변호사비가 5천불이었냐? 몇, 몇만불이었지. 이러언!"
그렇게 두 사람이 늦은 불씨를 일으키는데.
숙희는 그 당시 운진과 결혼을 염두에 두었다가 방금 말한 것처럼 '숨었어야 한' 이유가 슬프다. 그리고 그 슬픈 이유는 영원히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 한다.
영원히...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를 보낸 것이 아니었거든.'
'나는 그들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서 운진씨 앞에서 그렇게... 사라져야했지. 단 일년에 한번은 오션 씨티에 가서 추억을 되새기는 것으로 자족해야했었지.'
'안 돼!'
'나는 지금의 행복을 망치는 고백을 해서는 안 돼!'
숙희는 속으로 그렇게 부르짖으며, 남편 운진의 품을 파고들었다. "자기, 나 안아줘!"
운진이 팔을 천천히 감아왔다.
숙희가 운진의 품 안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자기, 무슨 일이 있어도 날 떠나면 안 돼! 절대로 나를 버려선 안 돼! 알았지?"
'여전히 괴로워하는군.'
운진은 아내 숙희를 안은 팔에 힘을 주며, 정애를 혼내던 광경을 눈 앞에 떠올렸다. '에잇, 뭘 같은 년! 돈 그만큼 줬으면 떨어질 것이지. 어디다 대고 약점을 잡아서 더...'
숙희가 남편의 잠옷 자락을 움켜쥐었다. "이유는 묻지 말아줘. 그냥 이렇게처럼... 날 안아주구 날 보호해 줘. 그러면, 자기가 하라는 대로 다 할께."
숙희의 말끝이 울음으로 사그러들었다. "사랑해."
"그래애..."
운진은 아내의 머리 너머로 펜실배니아 주의 네모 난 집을 떠올렸다. 없애줄게...
그는 누가 보여줘서 외워둔 명단을 다시 떠올렸다.
그는 그 명단 순위를 되돌려서 알트 월래스란 자를 맨 위에 올려 놓았다.
그는 되려 랠프를 맨 마지막으로 돌려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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