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의 미팅은 여섯시 넘어서 끝났다.
운진은 역시 대기실에서 텔레비젼의 저녁 뉴스를 보고 있었다.
이번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말쑥하게 차려입은 남자들이 몰려 나오는데, 첫눈에 봐도 아 회징이다 싶은 키 작은 백인 여자가 숙희와 나란히 나오는 것이었다.
두 여인은 굳게 악수도 했다.
숙희가 대기실의 유리문을 통해 운진을 찾고는 잠깐 더 있으라는 눈짓을 보냈다. 그리고 그녀는 곧 라비에서 어떤 백인 남자와 마주 하고는 얘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운진은 그 남자를 흘낏 봤지만 그냥 대화하는 분위기 이상임을 냄새맡았다.
사람들이 다 나가도록 숙희와 그 남자와의 대화는 끝나지 않았다.
뉴스가 다 끝나고 저녁 시트콤으로 넘어가는 것이 일곱시가 되었다는 것인데.
밖은 이미 해가 기울었다.
그제서야 숙희와 그 남자와의 대화가 끝났다.
두 사람이 아주 굳게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누구요?"
운진이 혼다 차를 몰다가 한참 만에 물은 말이다. "오래 아는 사이 같던데."
"웨인. 여기 아이에프티씨 헤드쿼터 회장."
"오... 그 사람이 왜..."
"나더러 전근 오는 거 생각해 보라고."
"..."
"근데... 나, 나도 모르게 생각해 본다고 했어."
"..."
숙희는 운진이 아무 대꾸가 없자 눈치를 봤다.
메릴랜드에서도 전근 얘기만 나오면 말을 딱 끊는 그이다.
숙희는 자신이 왜 운진의 눈치를 보는지 갑자기 화가 나기 시작했다. "나, 전근 오는 거..."
"맘대로 하시요!"
그가 툭 끊듯이 던진 말이다. "재론하지 맙시다!"
"나, 전근, 싫어서 그래?"
"맘대로 하라잖소!"
"아니... 왜... 소리를 지르지?"
"뭐, 어차피 다 결정났고 전근할 거 같으면 구태여 나한테 말할 거 없잖소."
"아직은... 내가 일을 더 해야 하고... 아직 우린."
"아직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내가 간섭할 거 없다는 말 아니요."
"아니, 그게... 왜 화낼 일이지?"
"화낼 일 아니면 됐시다." 운진이 차의 방향을 틀었다.
숙희는 문턱을 붙잡아야 했다. "어디 가?"
"나는 버스 터미널에서 내려서 돌아가겠소."
허걱!
숙희는 실망감에 숨이 막혔다.
"앞으로 나 신경쓰지 말고, 하시고 싶으신 대로 하시요."
"왜 그러는데?"
"..."
"응? 왜 그러는데에!"
"이제부터 나를 밖에다 피앙세라고 팔지 마슈."
"피... 피앙세 아냐, 그럼?"
"숙희씨 맘대로 하고 다니면서 새삼스럽게 무슨 피앙세요?"
"내가 맘대로?"
숙희는 어이가 없다. "내가 또 뭘 잘못했지..."
차는 어느 대로로 접어 들었다.
숙희는 도로 표지판이 머리 위로 스치는 것을 보기만 했다.
그녀는 한참 후 공항 가는 길 하고 깜짝 놀랬다.
그녀는 막무가내로 차 핸들에 손을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