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두개의 세상 pt.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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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작은 사내의 쉼방 2024. 7. 17. 08:07

   전에 지나가는 말처럼 운진이 말했다.
단풍 구경 한번 가자고. 
영진은 등하교 할 때마다 나뭇잎들의 색이 변해가는 것을 보며 이제나저제나 그에게서 연락이 오려나 기다린다. 그녀가 또 먼저 찾아갈 수도 있는데, 이번엔 남자니까 찾아오면 안 되나 하는 중이다.
자존심이 남보다 유달리 강한 그녀인지라 또 선뜻 나서기가 그렇다.
먼젓번에는 그걸 꾹 참고 그의 거처로 갔다가 다른 얘기만 실컷 하고 와줬는데.
   '설마 진희 만나는 건 아니겠지?'
   '나한테 절대 안 만난다고 약속했는데!'
영진은 결국 오빠에게 본심을 들켰다. "오빠... 미스타 오하고 아무 약속 없어?"
   "오형... 지금 열심히 공부해."
   "아아, 참!..." 영진은 마음이 조금 놓였다.
   "너무 놀았더니 잘 하면 퇴학 당한다고."
   "나더러도 그러더니. 공부하는구나."
   "주말에나..."
   "만나기로 했어?"
   "교회 가 봐. 오형 성가대에 있으니까 주일마다 교회 갈 거 아냐."
   "거긴 장로 교회라... 먼젓번에는 진희 따라 가긴 가봤는데, 분위기가 좀."
   "난, 뭐, 편안하고 좋더라."
   "그리구... 엄마 아빠한테 혼나잖아."
   "말 안 하면."
   "먼젓번에는 학교 간다고 거짓말 했는데. 거짓말 하니까 미안하구."
   "너두, 차암."
   "오빠가 날 위해서 말해주면 안 될까? 오빠한테도 나, 자존심 상하지만. 그래도 엄마 아빠한테 보다는 나으니까. 오빠가 날 어디 데려가는 것 처럼."
   "주말에 전화해 볼께."
   "정말이지?"
   "대신에 오형더러 술 사라야겠다."
   "내가 돈 줄께!"
   "됐다, 여동생아."

   숙희는 어느 덧 단풍이 무르익어간다고 느낀다.
특히 파크웨이를 아침 저녁으로 타다 보니 하루하루 완연해져 가는 색의 변화를 느낀다. 그렇다고 어디 누구랑 단풍 구경을 일 삼아 간다느니 그런 생각은 안 한다.
그녀에게 그런 구경은 시간낭비이고 귀찮은 일이다.
그냥 아무 데고 구경 잘 하네, 뭐.
   그런데 그러한 그녀의 신경을 조금 건드리는 일이 있다.
그녀는 그런 신경씌이는 것 자체가 자신에게는 역사에 없던 일이라고 의아해 하는데.
그 짙은 색의 추렄이 며칠째 안 보이는 것이다. 아침에야 그녀 보다 일찍 움직이는 것 같으니 그렇다 치고 저녁에도 그녀가 잠자리에 들기까지 들어오질 않는다.
   '내가 왜 신경 쓰지?'  
그녀는 은근히 신경질이 난다. 요즘 애들 많이 그러듯 아예...
그녀는 스스로 놀라며 고개를 마구 젓는다. 하마터면 살림을 차렸나 할 뻔한 것이다. 남이 연애하다가 살림을 차리든말든 무슨 상관이라고.
그녀는 커튼을 확 가렸다.
   그런 오해의 장본인 운진은 화원 뒷방에 불을 환히 밝히고 공부하느라 골머리를 썩힌다.
책이란 책을 전에 작업대로 쓰던 책상 위에다 몽땅 펼쳐놓고.
   내가 이 나이에 애들 사이에 껴서 무슨 공부를 한답시고. 그리고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본답시고. 
   어이구, 그렇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야 드시든가 말든가 하시지. 일일히 사전 찾다가 밤 새신다!
운진은 한국에서 수학을 전공할 때 시험직전에 들여다 보고도 거의 만점 받던 실력자이다. 그는 한번 한다고 덤비면 반드시 끝장을 보는 성미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그런데 미국 와서 공부 좀 하자니 영어기초가 영 벌로라서 다른 과목들도 죽 쑤는 것이다.
그는 때려치자를 수도 없이 외치며 꼬부랑글씨로 뒤덮힌 책을 끌어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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