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배달되어 온 음식을 부엌으로 가져와서 꺼내보니 제법 꼼꼼히 담아왔다.
‘단골이라 이거지!’ 숙희는 픽 웃었다.
숙희는 음식을 대충 꺼내놓고 먹기 시작하며 설이가 처음 서슴없이 내뱉은 말.
‘He’s dead. (그는 죽었다.)’
그리고 누가 묻든지 '그렇게 말하라' 고 할머니가 시켰다는 말.
그리고 ‘How do you know my uncle? (우리 삼촌을 어떻게 아세요?)’ 하고 묻던 말,
‘You know he’s a married man? (그가 결혼한 사람안 것도 아세요?)’ 말 등등을 곰곰히 되새겼다.
그녀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20년 만에 듣는 그의 소식인데.
그것도 처음엔 '죽었다' 고 들었는데.
숙희는 의외로 담담했었다.
‘뭔가 있다!’
숙희는 젓가락질을 팍팍 해댔다. ‘할머니란 이가 누가 묻든 그렇게 대답하라고 시켰단 말이지? 그 사람은 결혼까지 해 놓고? 아니, 누가 어떻게 말하라고 시켰든!’
그녀의 손아귀에서 나무 젓가락이 쉽게 부러졌다.
월요일은 공휴일이니 회사 전체가 논다.
천상 화요일날 회사에 전화를 걸어 설이가 혹 누구의 소개로 왔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그녀는 이날 따라 입에 안 맞는 음식이라 먹다 말고 남은 것을 부엌 쓰레기통에 쑤셔 넣었다.
‘이젠 바다에 가서 기다릴 일이 없어졌구나.’
그녀는 전화로 바닷가의 호텔에 예약 취소를 통고했다. 하루치의 벌금이 부가되었다.
그녀는 대신 여행사에 전화해서 하와이 여행 패케지가 있나 알아봤다.
월요일날 떠나 일주일 만에 돌아오는 할인권이 있어 그걸로 대신 예약했다.
그런 다음 그녀는 전화기 있는 데로 가서 녹음된 것들을 다 지우고 소파로 돌아왔다. 그녀는 소파에 앉으려다가 도로 가서 아예 자동 그리팅 장치를 꺼 버렸다. 그리고 그녀는 마지막으로 벨 소리도 안 들리도록 껐다.
'아, 이제 평화롭겠구나!'
그런데 다음날, 즉 토요일 정오쯤 메릴랜드 오션 씨티의 H 호텔에 평복 차림의 동양 남자 하나가 손에 꽃을 들고 나타나서는 카운터에다가 꼭대기 층의 가운뎃 방이 비었는지 물었다.
카운터의 백인 여자가 마침 그 방의 예약이 취소됐다는 말은 안 하고 투숙 수속을 마쳤다.
남자는 노동절 다음날까지 묵기로 하고 나흘치를 미리 치뤘다.
오십대 초처럼 보이는 (실은 정확히 오십이다) 그 남자는 방에 들자 싱크대에 물을 받고 거기에다 들고 온 꽃을 담갔다.
그의 이름이 오운진. 숙희와 약속한 그 장본인이다.
그는 희끗희끗한 머리를 쓸어 올리며 창가로 가서 오후의 햇살을 반사하는 바다를 내다봤다.
하늘이 어째 회색이다.
그는 요즘 들어 갑자기 침침해지는 듯한 눈을 부비고 다시 밖을 내다봤다.
아직도 동쪽 하늘은 회색이다. ‘젠장, 하필 비가 오려나?’
그는 어제 조카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어떤 여자가 삼촌에 대해 묻더라는 말을 듣고 용모를 물어보니 숙희임에 틀림없다고 단정지었다.
운진은 20년 묵은 죄책감에 사로 잡혔다. 조카가 숙희를 가까이서 본 느낌에 독신인 것 같다고 전하는 말을 듣고, 지금까지 혼자인지 아니면 결혼에 실패해서 혼자인지 어쨌거나 만날 수 있을까 하는 희망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오션 씨티에 온 것이다.
마음 한구석에선 그녀가 아직도 독신이기를 은근히 바라는 도둑심보가 동했다.
이제라도 합칠 수만 있다면 하는 바램이 동했으나 부끄러웠다.
'당신네 집에를 내가 갔었잖소. 보기좋게 물벼락 또 맞고, 그 때는 화도 나고 지쳐서 포기했다오. 참 나...'
그는 변명도 아니고 자책도 아닌 독백을 읊었다.
틀림없이 나보다 백배 나은 놈을 만나 잘 살겠지 했는데, 왜 혼자요?
혹 나는 늘 생각만 할 뿐 실행 못 하는 이혼을, 그대는 한 거요?
'설이에게는 왜 화를 낸 거요?'
그가 미루어 짐작한 그녀는 왕년에 미국인 남자친구가 있었던 걸로 안다. 그래서 그는 그녀가 반대하는 부모들이 우스워서 혹 그자에게 돌아갔나 하고 추측한 건 사실이다.
조카가 직접 물어보지는 않았다 하니 그 여자가 독신인지 기혼인지 모르는 것도 사실이다.
운진은 그 방 침대 위에 눕자 잠이 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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