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두개의 세상 pt. 01

pt.1 1-9x009

키 작은 사내의 쉼방 2024. 7. 27. 04:13

   20여년 전. 
결혼을 철저히 반대하는 모친을 설득하다가 실패하고, 숙희는 한 남자와 같이 오션 씨티로 달아났다. 
그 때가 1980년 노동절날이었다. 
둘은 호텔 방을 하나 얻어서 투숙하고는 밤새 부등켜 안고 울었다. 
숙희가 둘은 부모 허락 없어도 결혼할 수 있는 법적 나이이니 둘이서 식을 올리자고 아무리 종용해도 운진은 평생에 한번 하는 결혼을 그런 식으로는 할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다. 
반드시 나중에 후회할 거라는 것이 그자의 주장이었다. 
일단 헤어져서 양 부모를 진정시키고, 특히 양쪽 모친들을 설득시키고 나면 기회가 닿는대로 다시 거론해서 양가 축복하에 결혼식을 올리자고 굳게 약속했다. 
그때까진 서로를 찾지 말자는 좀 어색한 약속을 하면서 누구든 먼저 허락을 받은 쪽이 노동절날에 이곳 호텔 방에 와서 기다리기로 맹세했다. 
   다른 한쪽도 허락을 받으면 그때 여기 와서 만나기로. 
   누가 먼저 오게 될 거라는 예측도 없이. 
둘이 그랬던 그 날 여름의 끝을 재촉하는 비가 밤새 왔다...
   그 때 숙희는 외박 후 의외로 집의 허락을 쉽게 받아냈다. 외박하고 온 딸을 어떻게 못 하고 숨이 넘어가는 모친에게 난 이미 그 사람의 여자가 됐으니 결혼을 허락하라는 숙희의 거짓말 한마디에 딸을 가진 엄마는 졸도를 하고 말았다. 정말인지 아닌지 따지고 물을 용기도 없이 비록 계모였을 망정 딸을 가진 엄마는 그렇게 쉽게 무너졌다. 그리고는 딸을 들어선 옷차림 그대로 그 놈한테 가서 살으라고 내쫓았다. 
그리고 그 날로 숙희는 집과 인연을 끊었는데...

   그 다음 해의 노동절날, 숙희는 약속대로 그 호텔에 투숙했다. 
이틀을 기다려도 남자는 안 나타났다...

그 다음 해도 숙희 혼자 기다렸다...
그 다음 해도. 
그러나 그녀는 그를 집으로 찾아가지 않았다. 허락을 못 받았으니 못 온 사람을 찾아 본들 둘이 서로 마음만 아플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전화 연락도 안 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이십년이란 세월을 죽였는데...
그는 결혼한 남자이라는 소식을 이 날 20년 만에 들은 것이다.

   숙희는 소파에서 일어나 침실로 가서 옷을 잠옷으로 갈아 입었다.
그녀는 침실을 나와 부엌으로 와서 냉장고에 붙은 자석으로 된 광고번호들을 훑어보고 이 날도 중국 음식 캐리아웃을 시켰다. 
이제부터 정확히 이십분 후면 그 나이 든 중국 남자가 누런 봉지를 받쳐들고 문 앞에 나타날 것이다. 주인이면서 심심풀이로 배달을 한다는 신사형이다.
   주문 하고 정확히 이십분이 지났다.
딩동! 
문 밖에 스위치와 같이 달린 차임벨이 울렸다. 
숙희는 소파 위에 던져 놓았던 백에서 이십불 짜리 한장을 꺼내들고 문으로 향했다. 
문구멍으로 내다보니 그 늙은 중국 남자가 밖에 와 있다. 
그녀는 문을 열었다.
   “아하하, 니하오!” 늙은이가 허리를 굽혀 연신 인사를 했다. 
숙희는 값도 안 물어보고 이십불짜리를 주고 누런 봉지를 받았다. “땡큐! 빠이!”
   “아하하! 쌩큐, 쌩큐!”
매번 금요일이면 배달을 시키지만 십불이나 넘을까, 
그러나 숙희는 늘 이십불을 다 준다. 
숙희는 허리를 연신 굽실하는 늙은이를 두고 문을 닫았다. 
   언제부터인가 그 늙은 중국 남자가 올 때마다 집 안을 살펴보려는 기색 같아서였다.
   '하다 못해 실물 크기의 남자 인형이라도 세워 놔야 하는 건지...'
그녀는 그런 착상을 했다가 어떤 옛생각 떠올라서 불쾌해졌다.
아주 오래 전 다른 데 살 때 다른 중국남자가 배달와서는 봉지 안에다 나무인형 한 쌍을 넣었었던.
숙희는 지금 손에 들린 봉지를 선 채 뜯고 들여다봤다. 
   '여긴 아직 그런 거 없네...'

'[소설] 두개의 세상 pt. 01' 카테고리의 다른 글

pt.1 2-1x011 2000년의 9월  (0) 2024.07.27
pt.1 1-10x010  (0) 2024.07.27
pt.1 1-8x008  (0) 2024.07.27
pt.1 1-7x007  (0) 2024.07.27
pt.1 1-6x006  (0) 2024.0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