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두개의 세상 pt. 01

pt.1 1-6x006

키 작은 사내의 쉼방 2024. 7. 27. 04:11

   설이는 퇴근시간이 지나도록 안 왔다. 
숙희는 미쉘에게 전화를 걸어 모든 강습생들이 집으로 돌아갔음을 확인한 후 퇴근 차비를 차렸다. 
   ‘맹랑하네?’ 그녀는 속으로 분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더욱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하루 종일 씨름한 서류들을 한데 모아 들고 방을 나섰다. 
로레인이 퇴근 준비를 하면서도 알아차리고 숙희에게서 서류들을 받았다. “Have a good time, Sue! (좋은 시간 가져, 쑤!)”  
   “I’ll try! (노력할께!)” 숙희는 옆칸 매리안의 방을 들여다 봤다. 
매리앤은 전화기에 매달려 있었다. 
숙희는 매리앤의 머리 너머 벽시계를 가리키며 입으로만 벙긋거려서, ‘It’s Friday!’ 하고, 말했다. 
매리앤이 엄지 손가락 하나를 치켜 세워 보였다. 
숙희가 내일부터 휴가이므로 행운을 빈다는 제스처였다. 
   숙희는 매리앤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 거기를 떠났다. 
그녀가 복도를 나와 엘레베이터로 가니 벌써 많은 사람들이 모여 서 있었다. 
엘레베이터 세개 중 가운데의 것이 열렸다. 이상하게 늘 가운뎃 것이 먼저 올라온다. 
숙희는 사람들이 양보해 주는 바람에 여남은 명에 섞여 먼저 탔다. 
흑인 백인 섞여 탔는데 하나같이들 숙희를 경계하는 눈초리들이다. 그 이유는 뻔했다. 
숙희의 직책이 직원을 승진시키거나 자를 때 결정적인 마지막 카드를 쥐고 있으며 어쩌면 가을에 감원이 있을지 모른다는 소문 때문에 두렵기도 하고 밉기도 할 터였다.

숙희가 정문을 나서는데 백인 경비반장이 카운터 뒤에서 큰소리로 말을 던졌다. 
   “Have a nice vacation, Sue! (좋은 휴가 되세요, 쑤!)”
   “Thank you, Chief! (고마와요, 대장님!)” 숙희는 손을 크게 흔들었다. 
9월의 첫주 그리고 금요일의 오후 다섯시 반은 제법 선선했다. 
그 새 여름이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숙희가 얇은 코트 주머니에서 차 열쇠를 꺼내 화단 건너에 주차한 자신의 멀세이디즈 벤즈에 대고 원격조종장치 단추를 누르는데, 옆에서 귀에 익은 여자의 목소리가 났다. 
   “저기, 안냐세요.”
숙희가 돌아다보니 설이가 화초밭에 가까이 서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Why you didn’t come? (너 왜 안 왔니?)” 숙희는 조금 나무라는 투로 물었다. 그리고 그녀는 곧 후회했다. 아이를 나무랄 일이 아닌 것이다.
그녀도 초면인데 누가 집안에 대해서 꼬치꼬치 물으면 순순히 대답했을까. 
그래서 그녀는 표정을 부드럽게 고쳐보려고 했다.
설이가 한발 다가섰다. “Can you give me a ride? (저를 태워 줄 수 있으세요?)”
   “To your home? (너의 집?)” 숙희는 가슴이 이상스레 저려왔다.  
   “어어.” 설이가 우물쭈물거렸다.
그녀가 설이를 집까지 태워다 준다는 것은 거기에 누가 살고 있을지 모르지만 이십년을 생각만 하고 살아온 추억의 현장으로 가는 건지도 모르겠다. 
숙희도 말해 놓고 잠시 망설였다.
   “No, you can drop me off at bus stop. (아니요, 저를 버스 정류장에 내려주시면 돼요.)” 
   설이가 빠른 어조로 말했다. "Two blocks. (두 블렄.)"
   “I think I’d better drop you off at bus stop, too. (나도 너를 버스 정류장에 내려주는 게 나을 것 같다.)” 숙희도 빠른 말투로 대답했다. 
집까지 라는 말이 가슴을 떨리게 했고 ‘그는 죽었다’ 라는 말이 아직 실감나지 않아서 더욱 그랬다. 아이가 사진을 보자마자 입으로 불쑥 내뱉은 말이니 미리 준비했거나 꾸며내는 내용은 아닐 것이다. 
숙희는 내 맘 짚어 적어도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녀는 설이를 따라오게 하고 차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I lied… (저 거짓말했어요…)” 설이가 조그맣게 말했다.
숙희는 걸음을 멈췄다. 
   뭐에 대해서 거짓말인가?
   “That, you said he died? (그가 죽었다고, 네가 말한 것?)” 
설이도 가다가 섰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이며 끄떡거렸다. 
   “Why did you lie to me? (왜 나한테 거짓말했니?)”  
   숙희는 물어 놓고 또 후회했다. 왜 이래, 한숙희!

'[소설] 두개의 세상 pt. 01' 카테고리의 다른 글

pt.1 1-8x008  (0) 2024.07.27
pt.1 1-7x007  (0) 2024.07.27
pt.1 1-5x005  (0) 2024.07.27
pt.1 1-4x004  (0) 2024.07.27
pt.1 1-3x003  (0) 2024.0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