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두개의 세상 pt.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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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작은 사내의 쉼방 2024. 7. 27. 04:09

   숙희는 머리 끝에서부터 짝 밀려 내려오는 전율을 참으며 로레인을 향해 천천히 돌아섰다.
   “Are you alright? (너 괜찮어?)” 로레인이 걱정스레 물었다.
숙희는 마음을 가다듬은 뒤 입을 열었다. “Is she in today? (그녀 오늘 들어왔어?)”
   “Who? Who’s in? (누구? 누구 들어왔냐구?)”
   “This girl. No, I mean, new people. (이 여자애. 아니, 내 말 뜻은 새 사람들.)”
   “Of course! Let’s see... (물론이지! 어디 보자아...)” 
   로레인이 그녀 책상 맞은 편 벽에 핀으로 꽂힌 교육시간표를 들여다봤다. “Today, they are in Excel class, Sue. Room 104. (오늘, 그들은 엑셀반에 있네, 쑤. 104호.)”
숙희는 목청을 가다듬은 후 말했다. “Can you do me a favor? (부탁 하나 들어줄래?)”
   “Sure! What is it? (물론이지! 뭔데?)” 
   “Never mind. Thanks. (그만 둬. 고마워.)” 
숙희는 돌아서서 매리앤의 방으로 향했다. 
실은 로레인보고 그 여자애를 방으로 불러달라 하려다가 그만 두었다. ‘가서 보지.’
숙희는 매리앤에게 탄원서의 내용을 대신 해결해 달라고 부탁한 후, 강의실들이 있는 1층으로 내려갔다. 

   넓은 라비의 한쪽이 교육실들인데, 숙희는 그 중 104호실로 찾아갔다. 그녀가 밖에서 들여다보니 여남은 명의 신입사원들이 강사에게 모두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다. 
대형 스크린에 컴퓨터 화면이 확대되어 비쳐 있는데 엑셀의 눈금들이 빼꼭히 찼다. 손가락 그림자 하나가 E셀, F셀로 움직이다가 강사인 미쉘(Michelle)이 숙희를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었다. 
숙희도 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곧 미쉘이 문으로 다가왔다. 
   “Hi, Sue! Do you need something from me? (하이, 쑤. 나한테서 뭐가 필요해?)”
   “Hi! I’m looking for Sunny. Sunny Moon? (하이! 나 써니를 찾는데. 써니 문?)”
그 말에 어떤 조그마한 체구의 동양 여자가 앞 줄에 앉은 자리에서 고개를 돌렸다. 
그 얼굴에서 숙희는 운서 언니를 금새 알아볼 수 있었다. 
   ‘닮았다! 키만 언니보다 작고.’ 
   “Sunny? You can excuse. (써니? 나가 봐도 돼.)” 미쉘이 설이에게 손짓으로 말했다. 
그러자 키가 한 다섯자는 될까 말까 하는 그 동양 여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일어나 나왔다.
숙희는 교실 문을 닫으며 미쉘에게 입으로만 땡쓰! 하고 벙긋 했다. 
미쉘이 윙크로 대답을 대신하고 이내 스크린 쪽으로 돌아섰다.
설이가 숙희를 올려다 보며 고개로 인사를 했다.
숙희는 그 여자를 복도로 인도하며, “너, 설이 맞지?” 하고, 한국말로 물었다.  
   “어, 네.” 하고, 설이가 말을 더듬었다. 아무래도 한국말이 갑자기 튀어나오니 어려서 엄마 따라 미국에 온 터라 익숙하지가 않은 모양이었다. 
설이는 키가 한참 큰 숙희를 흘끔흘끔 올려다보며 따라 걷기만 한다. 
   “엄만 안녕하시니?”
   “엄마요? 우리 엄마 아셔요?”
   “응. 영어가 편해? English is convenient for you? (영어가 너한텐 편리해?)”
   “I’m not that good at Korean. (저 한국말은 그리 잘 못해요.)”
   “Okay. Follow me. This way. (알았어. 따라와. 이쪽으로.)”
숙희는 앞서 걸으며 순간적으로 후회했다. 설이를 괜히 불러냈다. 아니.
써니 문이라는 이름을 봤더라도 그냥 넘어갈 것을 하고 후회했다.
설이는 운서언니로 이어지고, 운서언니는 어느 남자에게로 이어진다.
20년을 한 남자에 대해 참고 살았는데. 
20년을 한 남자에 대해 원망하고 후회하고 갈망하며 살았는데. 
그 괴로움을 무너뜨리려고 한 때는 방종한 삶을 살았는데. 그러다가 어느 날 어느 부인네에게 뺨을 얻어맞고 정신을 차리니 어느 덧 마흔을 훌쩍 넘었는데.
설이는 앞서 가는 키 큰 여인을 어디서 본 듯도 해서 고개를 연신 갸웃거렸다.
숙희는 엘레베이터의 상승 단추를 누르고는 설이를 돌아다봤다. "학교는 어디 나왔니?"
   "..." 
설이는 엘레베이터가 내려온다는 숫자바뀜만 치켜다봤다.
숙희는 조금 무안해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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