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진은 말을 다 해버리고 딸의 비명이나 발악을 예상했다.
그런데 딸 아이는 전혀 뜻밖으로 소리없이 웃으며 앞을 지나 가게로 나가는 것이었다.
‘허! 쟤가 웃어, 지금?’
운진은 다행이라 해야할지 어쩔지 분간이 서질 않아 앉은 대로 멍하니 맞은 편 벽을 올려다봤다.
챌리가 문을 빼꼼히 열고 들여다봤다. "대디?"
“엉, 챌리야?”
“How much is this? (이거 얼마야?)” 챌리가 조그만 크기의 병을 들어보였다.
“오, 그거?”
운진은 핑게김에 가게로 나왔다.
그는 챌리에게 대충 생각나는대로 값을 말해주고 킴벌리를 찾으려고 가게 안을 살폈다.
킴벌리는 캐리아웃의 아주머니와 얘기를 하며 감자를 튀기고 있었다. 그녀는 높이 올라앉는 나무 걸상에서 아빠를 보고는 손을 흔들었다.
아주머니는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아마도 킴벌리는 아주머니가 저 먹을 것을 만들어 주는 대신 그 댓가로 감자를 기름에 튀기는 모양이었다.
“아빠?” 하는 챌리의 부름에 운진은 얼른 돌아다봤다.
“키미하고 무슨 일 있었어요?”
“아니. 그냥 얘길 좀 했어.”
“무슨 얘길요?”
“응. 내 속을 찌르는 얘기. 하지만 너한테 또 말하긴 좀 챙피한데?”
“호호. 나중에 키미한테 물어봐도 돼요?”
“아, 몰라, 임마! 니네 숙제 안 해?”
“키미가 먹을 거 만들어 오면 안에 들어가서 같이 할 거예요.”
“응. 그래.”
운진은 얼렁뚱땅 큰 애의 공격을 피하면서 전에 애들이 뒷방에도 컴퓨터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던 기억이 났다.
‘여기다가 하나 사 줄까...'
킴벌리가 들고 오는 쟁반에서 챌리가 마실 것들을 붙잡았다.
어떤 것이 누구의 것인지 모르지만 하나는 잘 여며진 샌드위치이고 다른 하나는 노랗게 잘 튀겨진 닭날개 네개이다. 그리고 프랜치 프라이 하나에는 치즈가 녹아서 덮혀있다.
운진은 딸 둘이 앞을 지나가도록 비켜 섰다.
킴벌리가 지나가며 무슨 뜻에선지 아빠에게 고개를 절래절래 저어 보였다.
챌리는 저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제스처로 양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빠가 이모와 동침했고, 그래서 엄마와 별거하다가 이혼했고 등등 충격이 많았을텐데도 딸 둘은 그런 내색을 보이지 않는다. 아빠란 이가 특히 큰애에게 더 미안한 것은 변호사의 말을 듣고 그 애가 친딸이 아니었던 것을 이혼사유로 밀어부쳤는데.
그래서 처제를 앙심먹고 추행했느냐는 공격에 처제인 영아가 나서서 허락된 통정이었다고 증언을 했고 아내란 여인은 바람 피우고 다녔던 것을 순순히 시인했는데.
이혼이라는 것이 비단 부부 둘이만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딸린 가족에게도 고통을 준다.
운진은 피치 못해서 영란과 이혼했지만 솔직히 말하라면 후회하고 있는 중이다. 어차피 그 태아는 아비가 누구이든 기형으로 인해 사산하기는 마찬가지였을테고, 아내의 바깥 생활을 제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되려 아내에게 용서를 바랐다면 차라리 덜 미안했을 것을...
운진은 딸 둘을 빼앗기고 덩그라니 빈 집에 남아있을 영란에게 미안해서...
그래서 그는 집으로 전화를 했다.
남편의 전화를 받은 영란은 의외로 반응이 별로였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전화를 하느냐는 빈정거림도 없었고, 예전처럼 짜증내는 것도 없이 운진이 묻는 말에 '응, 응...' 하는 대답으로, 그녀는 일관했다.
나중에야 비로소 운진은 알았다.
'눈치도 없는 자식 같으니라구!'
곁에 누가 있는 것이다.
'보나마나 그 끈질긴 조가녀석이겠지! 그 인간 진짜로 끈질기네...'
운진은 아내에게 그래도 방사선 치료는 거부하지 말고 받으라는 격려로 통화를 마쳤다.
'그러니까 그 집을 조가가 드나드는구만... 세상에!'
운진은 영호가 괘씸하게 여겨졌다. 그 병신새낀 그런 것도 못 막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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