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희가 신장 앞에서 운진을 마주했다.
"자기 예전에 돈 좀 있었겠다, 인물 그만하면 빠지지 않겠다, 뭐, 여러 여자 울렸겠네."
"에?"
운진은 차라리 악을 썼다. "농이라도..."
"자기 잊었나봐? 나, 자기 죽은 부인, 최영란씨 알잖아. 몰랐어?"
"에?"
"자기가 나랑 그냥 그렇게 끝내고 최영란씨와 결혼했다는 사실을 나중에, 그러니까 죽은 다음에 어떤 상해 고소건으로 알게 되었지만. 최영란씨는 그 옛날 교회 모임에서 아는 사이였잖아. 자기가 그 여자 따라서 교회도 바꾸고."
"아니, 그건... 아닌데. 그 여자가 날 따라 왔는데..."
"어쨌든! 나는 자기가 최영란씨와 결혼했으리라고는 꿈에도 상상을 안 했지만. 내가 나중에 알고 나서도 뭐라 했어?"
"아, 아니요."
"자기가 부인 죽고 나서 정애랑 잠깐 데이트를 했다... 뭐, 어디까지 갔는지는 모르겠고, 또 알고 싶지도 않고. 알고 보니 새부인과 동창이다... 그래서 안 보려는 거야?"
거기서 그만 운진은 얼굴이 빨개졌다. "당신한테 미안하고 부끄러워서 그러오."
"뭐가 미안해. 자기 참 그런 거 보면 순진한 척 하는데. 자기 안 그렇거든? 자기 안 순진하다는 걸 만인이 다 알어. 새삼스럽게시리..."
운진은 확 말하고 싶었다.
그녀를 우연히 다시 만난 것은 사실인데, 실은 전에 몸도 섞었던 사이라고.
그런데 숙희가 먼저 문간으로 향하는 바람에 미수에 그쳤다.
"얼른 나와."
숙희가 신장 위에서 렠서스 차 열쇠를 집어서 내밀었다. "자기가 뺄수록 도리어 더 의심을 사는 거야. 정애는 그러대. 좋으신 분이라고. 이해심도 넓고 마음이 따뜻하다고."
"..."
"자기도 정애가 내 동창일 줄은 꿈에도 몰랐을 거 아냐?"
"에? 그건 그... 그렇지요?"
아내가 김 여인과 얘기를 한참 나누는 동안, 운진은 그저 다른 곳만 두리번거렸다.
옆 시야에 김 여인이 종종 마주 보는 것을 느꼈지만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녀들의 이야기를 얼추 들으니...
한국에서 남편이 가을 학기부터 돈을 못댄다는 통고가 왔고.
남편에게 여자가 생겼는데, 그것도 애가 딸린 이혼녀라나.
정애는 어차피 곧 방학이고 새학기가 시작하는 9월 가서야 걱정할 일이지만 앞이 막막하다고, 마침 우연히 찾아진 동창에게 하소연을 하는 것이다.
'치사하게 나오는군! 이 사람은 보나마나 도와준다고 하겠지... 틀림없을 거야.'
운진은 아내의 경쾌한 말을 기대했다. '어쩌면 머물 곳도 마련해 줄걸?'
그런데 정작 숙희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였다.
"어쩌니? 그럼, 니네 애들 데리구 도로 나가야 하니?"
운진은 저도 모르게 속으로 무릎을 쳤다. '아하! 내모는구나!'
"나가면 내 앞으로 아파트 하나 있는데... 뭘 해 먹고 살지. 막막하다, 얘."
"그 아파트 처분하면 얼만데?"
"쪼끄매. 팔아봤자, 뭐... 끽 해야 삼십평 짜린데."
"난 한국 시세를 몰라서..."
숙희가 딴청을 계속 부리고 있는 남편을 툭 쳤다. "얘기 들었어, 자기?"
"으, 예?"
"남자들이 왜 그래? 부인은 미국에 애들 공부시키러 와서 힘든 일 마다 안 하고 뒷바라지를 하는데, 남편은 한국에서 바람이나 피우고."
"어, 예..."
바람이란 단어가 운진의 심장을 후빈다. '가만있어... 누가 바람을 피웠다는 거지?'
운진은 김정애란 여인이 어쩌면 큰 말썽을 저지를 것 같은 불안에 젖었다.
그런데 운진은 궁지에 몰리게 되면 전혀 다른 방향으로 튀는 청개구리 같은 저질스러움이 있다.
만일 김정애씨가 약간 치사하네 나오면 한숙희씨와 깨질 것을 예상해 김정애를 욕 보이는...
어차피 저도 맞바람 핀 주제에!
'[소설] 두개의 세상 pt. 03' 카테고리의 다른 글
pt.3 10-2x092 (0) | 2024.09.12 |
---|---|
pt.3 10-1x091 김정애에 대한 대답 (2) | 2024.09.12 |
pt.3 9-9x089 (0) | 2024.09.12 |
pt.3 9-8x088 (2) | 2024.09.12 |
pt.3 9-7x087 (0) | 2024.09.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