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돌아와서 하루하루가 여삼추처럼, 운진에게는 고욕이었다.
'언제 김 여인이 연락을 해 오고 아닌 말로 아내를 만나러 오기라도 한다면.'
그 생각만 하면 운진은 전화벨 소리만 들려도 그리고 집 앞에 차가 와 멎는 소리만 들려도 경끼를 일으켰다. 숙희가 외출할 일이 있다고 나가자 하면 혹시 김 여인을 만나지는 않는지 불안했다.
'두 여인이 만나서 이 말 저 말 하다가 불쑥... 알아지면!'
그 생각만 하면 운진은 앉았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서성거렸다.
'이래서 인간은 죄 짓고 못 사는 거구나...'
"자기이!"
현관문 여닫히는 소리에 이어 숙희의 부르는 소리가 났다.
운진은 이층방에 있다가 후닥닥 나섰다.
"자기이! 저녁 아직 안 먹었지?"
숙희가 시장본 봉지를 양손에 든 채 부엌으로 들어갔다. "내가 먹을 거 사왔다?"
내가 먹을 거 사왔다?
이 말이 운진의 머리를 쇠망치로 때렸다.
"어, 어디, 서?"
운진은 입이 안 떨어졌다. "혹시..."
"응? 뭐?"
숙희는 꽁꽁 여민 비닐 봉지를 푸느라 바쁘다. "식기 전에 먹어야 하니까, 자기, 애들 좀 불러. 빨리 내려오라구. 식었으면 어쩌지?"
"오, 아, 알았어. 근데! 왜 혼자 나다니나!"
운진은 조바심 났던 것을 야단으로 바꿨다. "나더러 사오라 하던지 하지 않고."
부엌 식탁에 사 온 음식들이 차려지고, 운진의 식구가 모두 둘러앉았다.
숙희는 사오긴 했지만 그녀의 천성이 그래서 골고루 나누는 일은 운진이 했다.
챌리와 킴벌리는 엄마에게 전화로 미리 부탁한 대로 제 것들을 알아서 챙겼다.
남은 것이 매운 갈비탕과 잡채밥. 매운 갈비탕이 운진의 것이라고.
"나 이거 먹으... 라고?"
운진은 기분이 묘했다. "나한텐 물어보지도 않았으면서?"
"으응. 정애가 이거 잘 먹을 거라던데? 잘 먹을 거라구."
"정! 누, 누구? 아아. 김..."
"우리 잡채랑 갈비탕이랑 같이 나눠 먹을까?"
"어, 그거 좋겠네."
아빠의 어색한 반응에 챌리와 킴벌리가 서로 보고 웃었다.
이제 아빠와 엄마의 금실이 좋은 것으로 보여서.
운진이 그릇 하나를 가져왔다.
"이거 그릇 뭐야, 자기?" 숙희가 물었다.
"아. 갈비탕 나눠 먹으려구."
"나눠 먹자구? 왜?"
"어, 그냥?"
"왜, 나랑 같이 먹는 게 싫어?"
"어?"
그러고 나서 운진은 눈을 내려 떴다.
부부가 한 그릇에서 같이 떠먹는 것이 당연할 텐데.
정작 숙희보다 운진이 더 어색해한다.
그런데 챌리가 나섰다. "근데, 엄마. 누가 아빠 갈비탕... 잘 먹을... 거라구?"
"누구?" 킴벌리도 끼었다.
"엄마랑 아빠랑 어디 먹으러 갔다가, 글쎄, 나 한국에서 다닌 칼리지 동창을 이십 몇년 만에 버지니아에서 만났잖니. 니네들도 알잖아? 저기 가면 백화점 밑에 있는 그 푸드 코트?"
운진은 아내 숙희의 신나서 하는 말이 저 멀리서 까마득하게 들렸다.
그런데 키미가 아빠를 곁눈질로 보며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었다.
Uh-oh! You're in trouble!
아마도 키미가 그렇게 말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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