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두개의 세상 pt.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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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작은 사내의 쉼방 2024. 9. 12. 05:26

   숙희가 갑자기 입을 가리고 웃었다. 
   "자기는... 내가 막 때려도, 왜 때리냐고만 했지, 맞상대 한 적이 없잖아."
   "치이."
   "그 정도로 쑥맥... 같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 근데."
   "한두사람이 그러는 게 아냐. 심지어 자기를 뭐 얼마나 안다고, 아담도 자기 은근히 겁난다고 하대?"
   "헷! 치킨 자식. 욕 좀 섞어서 썼더니 겁 먹었나?"
   "그런 욕설이야... 미국애들 말을 강조할 때 많이 넣으니까 큰 비중은 아닐 건데. 자기가 처음, 그러니까 나랑 같이 만나러 나갔던 날, 자기가 쳐다보는데 그냥 보는 눈빛이 아니었대나?"
   "흥... 난 애담인가를 당신이 소개시켜줘서 그 때서야 알았는데?"
   "그 땐... 그냥 악수 정도나 하고 헤어진 거 아니었나..."
   "내가 말이나 했소?"
   "그러게... 뭘 봤길래 나한테 그런 말을 직접 했지?"
   "..."
   운진은 머리 위로 지나가는 도로 사인판이나 쳐다봤다. "이제 버지니아네!"
음식을 파는 것들에서 밤늦게 여는 데라고는 패스트 푸드 레스토랑들 밖에 없다.
   "정크 푸드를. 그것도 야밤에."
   숙희가 차창 밖을 부지런히 살폈다. "웬만하면 그냥 올라갈까, 자기?"
운진은 고속도로에서 보기에 제법 큰 마을 같아서 빠져나온 동네가 정작 눈여겨 보니 아주 허름하기 이를 데 없는 촌마을인 것에 실망했다. "그래도 앞으로 서너시간은 더 가야하는데, 당신 참을 수 있겠어?"
   "실은 시장하긴 해... 그렇다고 이런 촌 동네에까지 이십사시간 하는 한국 음식점이 있을 리는 없고."
   "저거 뭐야?"
   운진이 앞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차이니스?"
   "그게... 차라리 나을래나?" 숙희는 저도 모르게 배를 쓰다듬었다.

   달리는 차 안에서 숙희는 음식을 무릎 위에 펼쳐놓았다. 
그리고 그녀 한 수저 먹으면 다음에는 수저에 밥을 꾹꾹 눌러서 운진의 입에 대주었다.
음식은 플래스틱 포크로 찍어서 흐르지 않도록 조심하며 먹여주고...
   '나 이러다 정말 이 이에게 빠져들어가는 것 아냐?'
숙희는 운진에게 사정없이 기울어지기 시작하는 감정을 억제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내가 이러면 안 되는 건데... 정말로 사랑에 빠지면 곤란한데...'
집에다 놔두고 온 셀폰으로 얼마나 많은 통화 시도가 들어와 있을래나.
   '아마 제레미가 가장 많이 걸어왔을 거다.'
   '그 다음이... 보나마나 팦...'
   '그리고, 아담.'
아니면, 정말 이 이 말대로 전화들을 안 했을까? 
이 이 정도의 남자가 뭐라 하는 것에 눈 하나 깜짝할 백인애들이 아닌데.
그러면서 숙희는 속으로 손가락 셈을 해보았다. 
   '뱃속의 아기가 틀림없이 이 이와 셐스를 가졌을 때 임신되었어야 하는데...'
숙희는 그 날 생각만 하면 운전하는 남편에게 열심히 먹여주던 손에 힘이 빠진다. 
   '소노그램으로 아기의 얼굴이 동양인인가 서양인인가 물어볼 수도 없고...'
숙희는 정신을 차리고 밥을 꾹꾹 눌렀다.
보름 차이라고 그녀는 셈했다.
그러니까 아담과 셐스를 하고 나서 약 보름 후 남편과 셐스를 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 달부터 멘스가 건너뛰는 것을 안 것이다.
아담과 셐스했을 때는 아마도 배란기 전이었을테고, 남편과 셐스했을 때는 배란기가 후였을 것이다.
배란기 전과 후 어느 때가 가장 배임시기인지.
닥터 정이 마지막 월경이 언제였나를 놓고 출산예정일을 계산했을 때, 숙희는 아찔했다.
마지막 멘스로 잡는다면 아담과 남편 둘 다 들어가는 것이다.
   그녀가 에밀리를 임신했을 때는 배란기 운운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그냥 뭇놈들한테 윤간 당한...
   그리고 그녀는 대충 혼자 계산해서 잡았던 예정일을 보름 앞두고 화장실에서 출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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