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희는 부친이 놀 바에는 디 씨로 내려와서 가게 서무나 봐 달라는 말에 고모와 의논한다.
"너... 공희엄마랑 잘 할 수 있겠어?"
"그 엄마랑은 한국에서부터 안 좋았어, 고모."
그녀의 고모부가 고모 옆에 앉아서 듣고 있다가 큰기침을 했다. "가지 마라! 언제부터 지가 애비라고 너더러 오라마라 한대냐!"
"왜 오란 말이 나왔는데." 고모의 말이 좀 언짢은 기색으로 나왔다.
슥희는 고모를 얼른 봤다. "연락을 제가 했어요."
"얘도 하도 답답하니까 거기는 일자리가 있나 하고 물어봤겠죠, 여보."
"서두르지 마라. 그냥 더 쉬면서 기다리다 보면 좋은 자리 찾아지겠지."
"얘도 전공 아까우니까..."
"여기서 너더러 돈 벌어오라는 사람 없으니까, 부담 절대 갖지 말고 신부수업이나 해."
"요즘에 누가 신부수업을 한다고 그래요."
"아, 밥 빨래 정도는 배워서 시집 가야지. 미국이라고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나?"
"아니, 숙희가 내일이라도 시집 가요? 왜 난리대?"
"숙희... 너, 먼젓번에 그 미국놈 발로 차서 쓰러뜨리고는 밖에 안 좋냐?"
"..."
숙희는 그 소문 때문에도 앨런타운을 뜨고 싶다. "친구 대나가 다 해명해서 조용해요."
숙희가 고모네 뿐만 아니라 앨런타운을 뜨려는 이유는 사촌 상훈 때문이다.
상훈은 그녀가 한국에서 엄마랑 단칸방에 살았을 때, 상경해서는 부득부득 끼어 잤다. 말로는 제일 좋아하는 동갑내기 사촌이라고 하는데, 상훈이는 손버릇이 안 좋았다.
자는 척 하면서 사촌의 엉덩이나 가슴에 손을 대고...
그런 상훈이가 다음 달이면 한국에서 제대하고 이리로 이민 온다.
그렇잖아도 전화만 걸어오면 숙희 바꿔 달라고 떼를 쓴다고.
숙희 보고 싶어서 눈에 진물이 난다면서...
숙희는 상훈과 실상은 그 어느 쪽으로도 핏줄이 섞인 친사촌이 아니기 때문에 성년 되어서는 두려운 것이다. 아닌 말로 친사촌 아니니 같이 살자고 나오면 정말 곤란한 것이다.
그런데 숙희가 그런 상훈을 피해서 워싱톤 디 씨 근교에서 가짜 보석상을 운영하는 아빠에게 간다면, 아빠의 두번째 부인인 공희 엄마와 부딪칠 것이다.
도로 한국에 엄마한테 나갈까...
그 날 밤, 숙희는 서울에 혼자 사는 엄마에게 전화하며 보고 싶다고 울었다.
"그래도 차라리 한 선생님한테 가."
"아빠네루 가라구?"
"너 상훈이 알잖아. 그 미친 놈이 한 집에 있다가 무슨 짓을 할 줄 아니."
"뭘 피하면 뭘 만난다고... 그래도 공희네가 상훈이 보다는 나을까, 엄마?"
"거기는 적어도 널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괴롭힐 미친 자가 없잖니. 니가 공희를 잘 다스려. 그래서 걔 엄마가 지 딸 때문에라도 널 잘 대우하게."
"이제 와서 나랑 공희가 잘 어울려질지 의문이야, 엄마."
"걔 엄마가 딴 게 아니라, 아마, 니가 지 딸 공희 보다 인물이나 공부가 훨씬 더 나으니까 샘이 나서 그러지. 그렇지만 공희로 하여금 널 잘 따르게 만들면, 너한테 어쩌겠니."
"어휴... 난 그런 데에 소질이 없어서, 엄마."
숙희는 펜실배니아 주의 앨런타운에서 워싱톤 디 씨의 북쪽 근교로 이사하기로 결심을 굳히고 친모와의 통화를 마쳤다.
숙희는 빨간색 트렁크 두 개만 달랑 가지고 하늘색 혼다 세단에 몸을 실었다.
"언제고 오너라."
고모가 그녀를 안아주며 한 말이다.
고모부는 손만 흔들었다. "착하다. 엄마가 아빠한테 가란다고 가는 너."
숙희는 이 머나먼 남의 나라 땅에 와서 혈육이나 친척이 두려워서 공중에 붕 뜨는 신세가 스스로도 처량하다고 여긴다.
그래도 손버릇 나쁜 사촌 보다는 입 건 계모가 낫나.
숙희는 고모네 집 앞 드라이브웨이를 후진으로 나가며 앞 방향에다 무턱대고 인사했다.
고모와 고모부가 나란히 서서 손을 흔든다.
숙희는 눈물이 왈칵 나왔지만 애써 감추고 차를 전진시켰다.
"후욱! 내 신세야!"
그녀가 사기통 짜리 혼다 차를 몰고 나가는 골목에 오후의 햇살이 쨍쨍 내리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