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희는 이글 파이넨셜에서 보내온 잉여 자금 내역을 검토하고 있다.
'이 정도면 웬만한 은행은 충분히 인수하겠네...'
숙희는 그 두 지사가 팔린 금액이 전액 재투자 된 것을 발견했다. '진짜 새 회장은 사심 없이 사세 확장에만 관심이 있는 모양이네?'
이제 그녀는 이글이 군침을 흘릴 만한 정도의 은행을 찾아줘야 하는데.
모두에게 구월이 빠르게 흘러가고 시월이 왔다.
영란이 소문도 없이 사라졌다.
그 동안 운진과 숙희는 교회 예배라고 딱 한번 참석했다.
웬일로 성렬이 운진을 보고 피하는 기색이었다.
"성이 계속 나와서 목사님 말대로 성경공부하고 문답 통과해서 세례 받으면, 일 나거든."
병선의 친절한 설명을 운진은 한마디로 답변했다. "너나 열심히 해서 회장 나와라."
"에이, 나는..."
병선이가 진희의 눈치를 봤다. "성을 장로회에서도 찍던데."
"어떻게. 니네들은 결혼식부터 올려야 하는 거 아니냐?"
운진이 병선과 진희의 말문을 막으려고 한 말이다.
그 날 광고에서 청년회 가을 소풍이 안건으로 나왔다.
그 안건은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청년회는 자세한 소풍 계획을 당회에 제출해서 재가를 받아야 교회 버스 사용이 허락됨.
참가 비용은 총무에게 선납 바람. 등등...
"시월 셋째주면, 잘 하면 단풍 구경 볼 만 하겠네, 성."
병선의 그 말에 운진은 별 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황성렬이 열심인 거야 악착인 거야.
청년회 가을 소풍의 목적지는 두말 할 것도 없이 버지니아 주의 스카이라인 드라이브.
"가봤어요?" 운진이 숙희에게 물었다.
숙희는 고개를 저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가려구?"
"뭐... 어차피 전..."
"그 때 가서 얘기해."
"돈은 미리 내 놓을께요."
"안 가면 나중에 환불되나?"
"에이. 그, 뭐, 얼마나 된다구요. 개스값에 보태 쓰겠죠."
둘이 친교실 한 구석에서 커피를 사이좋게 하며 얘기하는데.
삼십대는 훨씬 넘어 보이는 사내가 다가왔다.
"혹... 한숙희... 아녀?" 남도 사투리가 물씬 풍겼다.
"네?"
숙희는 속으로 이미 놀랬다. "그런... 데요?"
"이잉... 맞네. 나여, 김 중위."
"아!"
순간, 숙희는 운진의 손을 꽉 잡았다. "어. 어떡해..."
운진은 처음 보는 사내인데, 숙희의 떠는 것을 느끼고는 광끼가 발동했다. "누구요, 숙희씨."
"어... 인사 나누자구요?" 김중위가 손을 조금 내밀었다.
김흥섭이도 태권도 교관으로 뼈가 굵은 자인데.
한숙희를 은근히 방어하려는 자세의 사내에게서 살기가 풍긴다. 무술이 출중하게 느껴진다는 말이 아니라, 이 자는 다른 끼가 풀풀 뿜어 나온다는 말.
죽일 살자의 살기. "김흥섭이라고 하지요."
"누구요, 숙희씨." 운진이 흥섭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 한국에서 대학 다닐 때, 교, 교관. 안녕하세요?" 숙희는 어쨌거나 인사를 했다.
"응... 그렇다면, 별로 반가운 손님은 아니겠네." 운진이 흥섭을 아래위로 꼬나봤다.
"많이 이뻐졌네잉. 그 새 더 숙녀가 돼버려 갖고?"
아 하고 숙희는 다시 운진의 눈치를 봤다.
운진은 그 자의 면상을 손바닥으로 밀어버리려는 충동을 가졌다. 그러나 그는 숙희의 손에서 빈 컵을 받아들고는 움직이자고 제스처했다.
숙희는 마치 운진의 품 안으로 날아드는 새처럼 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