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희는 알 것 같은 음성의 남자가 받은 것 같은데 그냥 끊어지는 통화를 이해 못한다.
그 사촌인가 하는 사람 같은데. 운진씨가 안 받는다고 한 건가.
그녀는 수화기를 천천히 놓았다. 내가 전근을 고집부려서 우린 끝난 건가.
그녀는 일이 필요했다. 그녀는 자립을 계속 이루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아이에프티씨를 고집한 이유는 전망이 좋고 그녀의 적성에 맞고 그리고 초봉부터 보너스에다 여행 수당을 합치면 웬만한 4년제 대학 졸업자가 평균 받을 것과 다르기 때문이다.
문제는 운진의 지적대로 이글이 그녀를 계속 원했기 때문에 재보직을 임명받았고.
결국에는 거의 선택없이 남 캐롤라이나 주로 전근을 택해야 했는데.
그녀는 누구보다 더 이해해 줄줄 알았던 운진이 마치 절교를 하듯 싹 돌아서는데에 소위 억장이 무너지고. 또 전처럼 삶에 대한 의욕이 상실되어간다.
내가 하는 일이 그렇게 대단하냐구? 내가 화원에 계속 있었으면 뭐가 되는 건데.
그렇다고 우린 동거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었잖아. 나는 거기서 허송세월만 보내다가 때가 되면 그를 받아 들이고 그냥 어영부영 그의 여자가 되는 거?
그렇다고 내가 그의 살림을 도맡아 한 것도 아니었잖아.
숙희는 손가락 끝으로 눈물을 찍어냈다. 나더러 날아갈 때가 되면 훨훨 날아가래더니.
그녀는 갑자기 이상한 예감이 들어 패디오 도어로 다가갔다.
그녀는 처음에 눈인 줄 알았다.
주차장을 비추는 가로등의 불빛에 반짝이는 것은 아주 천천히 내리는 빗방울이었다.
그녀는 반짝이는 물방울들을 보며 슬라이딩 도어에 바짝 대어진 소파에 천천히 앉았다.
그 비가 차로 여덟 시간 걸리는 메릴랜드 주에는 눈가루를 뿌렸다.
운진과 병선만 술을 했는데. 진희와 영진은 방에서 나올 줄을 모른다.
"지니가... 영진씨더러 성한테 어떻게 갚을 거냐고, 계속..."
"놔 두시라고 해라."
"영진씨 오늘 교회로 성 찾아온 거..."
병선이 방 쪽을 흘낏 봤다. "애비란 냥반이 원래 움직이는 것 싫어하고, 신경질에다 화를 잘 냈대."
"..." 운진은 잠자코 술을 또 비웠다.
"실은, 지니가 영진씨한테 전화 해서 되게 뭐라고 했어, 성."
"뭐라고..."
"신세진 거를 그런 식으로 처리하는 거 아니라구."
"..."
"아주..."
병선은 남을, 영진을 흉 보려다가 사촌형에게 혼날까봐 입을 다물었다. 널 줘버리라고...
병선은 술을 더 하겠다는데 진희가 강제로 끌다시피 해서 둘은 화원을 떠났다.
운진은 그 둘을 배웅하고 들어와서 영진이 소파에 가만히 앉은 것을 새삼 발견했다.
"눈이 제법 많이 오네요. 그러니까, 화이트 크리스마슨가?"
운진은 리빙룸 테이블에 어질러진 것들을 대강 주워 모았다. "집에서 아세요?"
영진이 얼굴을 반짝 들었다. "운진씨!"
"녜."
"아까 전화..."
"아...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저, 운진씨 사랑해요!"
"아..."
"그 전화한 분, 상관않고, 저 운진씨 사랑할래요."
영진이 발딱 일어서서 운진을 마주 봤다.
운진은 계획대로 잘 됐다 싶어 서슴없이 영진을 확 끌어안고 입술을 덮쳤다.
영진의 작은 몸이 운진의 품 안으로 쏙 들어갔다.
운진은 영진을 소파에 쓰러뜨리고 그 위를 덮쳤다.
영진은 작정하고 각오한 듯 그의 목에 매달렸다.
운진은 아주 서슴없이 영진의 청바지 안으로 손을 쑥쑥 넣었다.
영진이 그의 눈을 들여다봤다. "속궁합 맞춰 보는 나쁜 남자, 맞죠!"
"함 맞춰봅시다!" 운진은 영진이 입은 바지를 사정없이 끌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