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시련
이제 숙희의 책상에 남자의 사진이 생겼다.
운진이 간편한 등산복 차림으로 언뜻 돌아보는 자세가 찍힌.
그러나 그의 어설프게 웃으려는 표정이 그의 편안한 특징과 어울려서 오히려 좋다.
숙희는 운진과 같이 시간을 보내면 한가지 늘 얻는 것이 있어 좋다.
그는 남을 편안하게 해 주는 마음 씀씀이가 있다.
숙희가 가슴이 뭉클할 때나 기분이 좋을 때 그를 툭툭 치는 버릇이 생기는데, 그는 거의 개의치 않고 히히 웃는다.
이 날 둘이는 각자의 일을 마치고 만나서 버지니아 주의 어느 국밥을 맛있게 한다는 음식점으로 가기로 되어있다.
10월하고도 중순경으로 접어드는 어느 금요일이다.
운진은 집에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아직 오지않는 숙희를 그녀네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그는 그녀의 개도 벌써 밥 주고 걸려 놓았다.
'길이 이렇게 밀리나.'
'아니면 갑자기 잔무가 생겼나.'
10월 중순의 저녁해는 여섯시면 벌써 넘어간다.
'지금 출발해도 버지니아에 도착하면 일곱시가 넘을텐데.'
'기왕에 늦은 거, 오면, 어디 가까운 데로 가자고 해야겠다.'
여덟시가 되어 사방은 깜깜해졌다.
운진은 추렄에서 내려 인도로 올라섰다.
골목으로 들어오는 헤드라이트만 나타나면 운진은 몸을 숙여가며 그 차의 모델을 읽었다.
이제 귀가 시간들이 다 지났는지 골목으로 들어오는 차가 없다.
운진은 골목 어귀까지 걸어갔다 돌아왔다 하다가 손목시계를 들여다봤다.
야광으로 열두 점을 반사하는 시계는 아홉시가 넘었다.
그 때 골목으로 머플러 소리가 좀 요란한 큰 차가 들어왔다.
'이 집 밴이다!'
운진은 이 집 가족들이 가게 나갈 때 쓰는 닷지 밴임을 금방 식별했다. '날 싫어하든 어쩌든 일단 인사는 해야 도리겠지?'
운진은 그 집 드라이브웨이 곁에 미리 가서 섰다.
그 밴 추렄이 움찔움찔 하더니 드라이브웨이로 올라왔다.
운진은 무조건 그 밴을 향해 꾸뻑 인사했다.
그 밴의 헤드라이트가 꺼지고, 엔진이 푸르르거리며 꺼졌다.
옆자리에서 공희모가 내렸다.
그녀는 운진을 본 체도 안 하고 집으로 향했다.
한씨가 운전석에서 내렸다.
그는 헛기침을 두어번 하면서 그도 역시 집으로 향했다.
운진은 식구 또 한명이 있지 않나 하고 밴을 쳐다봤다.
그 때 집 앞으로 소형 승용차가 다가와 멎었다.
'아아아!'
운진은 불길한 예감에 소름이 끼쳤다. '뭔 일이 있었구나!'
그 소형 승용차는 숙희의 혼다 차였고. 옆문이 열리고 공희부터 내렸다.
운진은 운전석 쪽으로 부지런히 가서 문을 열어주었다.
숙희가 차 핸들에다 두 손을 얹은 채 앞을 보고 있다.
운진은 구태여 기다렸다는 둥 가게에 급한 일이 있어서 갔느냐는 둥 아니면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느냐 둥 묻지 않기로 했다.
공희가 조그만 소리로 안녕하세요 하고는 절룩거리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운진은 숙희가 내리도록 문에서 비켜 섰다.
"오운진씨!" 숙희의 부르는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운진은 얼른 구부리며 그녀를 들여다 봤다. "녜!"
그녀가 굳은 얼굴을 하고 그의 눈을 찾았다. "오운진씨, 나 사랑해요?"
"갑자기 왜 그러시죠?"
"대답부터 하세요."
운진은 순간 경솔하지 말자고 자신을 타일렀다.
"물론입니다! 숙명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