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숙희
숙희가 레전씨 은행에서 일주일째 일을 배우도록 대나에게서는 연락이 안 왔다.
그래서 그녀가 대나에게 장거리 전화를 걸었다. 일단은 어디에 취직이 됐으니 큰 부담 갖지 말라 그렇게 말하려고.
그랬는데 대나의 모친의 말이 그녀가 무슨 사정이 있어서 다른 지방으로 갔다는 것이다.
숙희는 그냥 알았다고만 말했다.
홍일점처럼 레전씨 은행에 동양여인으로는 쑤가 유일한데, 이주째 접어드는 근무에서 이미 상사들의 총애를 받기 시작했다.
그녀는 나이 스물일곱에 비해 성격이 너그럽고 통이 크며 어쩌다 남자 직원들이 농반 진반으로 데이트를 언급하면 '나는 약혼자가 한국에서 오기를 기다린다'는 잌스큐즈로 무마한다.
그녀가 새까만 머리를 층층으로 커트하고 정장한 차림으로 텔러들 뒤를 다니면 고객들이 우정 호기심 서린 시선으로 빼놓지않고 본다. 그녀의 글래머러스한 몸매는 정말 근사해서.
그녀에게 전용 자리가 배정되었다.
"콩그레이출레이숀스!" 하워드가 쑤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 외 많은 직원들이 쑤를 축하했다.
그리고 레전씨 은행이 또 하나의 지점을 디 씨 한복판에 낼 예정인데, 은행 오너가 쑤 한이라는 신입사원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는 귀띔을, 제인이 했다.
[어쩌면 당신이랑 내가 여기서 차출될 것 같아요.]
"Like when... (언제쯤...)"
"Right now, they're looking for a location. (현재 장소를 물색 중이요.)"
아, 그럼, 뭐, 아직 멀었다는 얘기네.
숙희는 미리 들떠서 떠벌리는 게 미국인들의 습성인가 보다고 여기고 말았다. "Let me know when it happens. (그 일이 벌어질 때 알려줘요.)"
그렇게 되면 그 때 가서 방을 따로 얻어야 하나.
숙희가 첫 주급을 받아서 공희모에게 보였더니 냉큼 받아서는 꿀 먹은 벙어리다.
그래서 숙희는 개스비나 점심값을 달랬는데, 아버지한테 가서 손 벌리라는 것이었다.
아마 그나마 좀 되려던 가게를 팽개치고 직장생활한답시고 다니는 것이 공희모의 눈에 되게 아니꼬운 모양이었다. 공희는 그나마 2년제도 포기하는데, 너는 졸업에 취직도 했다 이거지 하는 심통으로.
"아빠 가게가 좀 어때요?"
어느 한날 숙희가 부친에게 좋게 물은 말이다. "공희가 잘 하죠?"
"너 반도 못 따라가지. 걔는 여기서 칼리지 다녔다는 애가 어떻게 쉬운 영어도 못 알아듣냐? 손님이 물어보는 말에 대답도 얼른 못 하고. 나 보다도 못 해."
"그럴 리가요."
숙희는 이제 부친에게 싫은 감정이 다시 생겨나기 시작한다. 저 교만함은 언제 꺼질런지...
"너 다시 나와야겠다."
"저 취직해서 다니잖아요."
"엄마한테 돈 받은 수표 줬는데, 쥐꼬리 만하다며?"
"아직 초보니까요."
"그 돈 내가 줄께, 여기 나와."
한씨네 가게 옆의 드라이클리닝에서 일하던 독신 아주머니가 그만두었다.
한사장이 하도 귀찮게 해서어!
세탁소 남자의 농반 진반 말이었다. 꼴에 눈은 높아요.
그런데 공희가 나오고 나서부터 한씨는 어치피 꼼짝 못 한다. 왜.
작은딸은 집에 가면 모친에게 그 날의 모든 일을 자초지종 고해바치기 때문이다.
그러니 가게를 비우고 딴 짓을 했다가는 공희가 제 엄마에게 그대로 일러 바쳐서 난리가 날 것이기 때문이다.
큰딸은 속으로야 어쨌거나 절대 발설하지 않았는데.
한씨는 이제 양품점의 진희를 자주 부른다. 이유는 그녀의 친구로 하여금 그 청년을 만나봤으면 한다는 핑게인데.
은근한 속셈은 따로 있는 듯 했다.
스물 넷의 아가씨는 그만 두던가 아니면 아버지뻘 되는 아저씨를 무시하던가 해야 했다.
그리고 진희는 공희를 별로 안 좋아해서 대화도 잘 안 한다.
한씨는 가게를 처분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어차피 그 아주머니가 없는 동네 관심도 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