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희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다시 실직자가 되었다.
그녀가 운진에게 제일 먼저 의논한 것이 화원 안채를 떠나 아빠네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는데 그가 노 한 마디로 일축했다.
"사실 그 동안 염치없이 돈도 안 내고 살았는데..."
"그렇게 말하면 제가 화를 내죠."
"남들이 우리를 어떻게 볼까도 걱정되구."
"그게 무슨 상관이예요. 그리고 남들이 우리를 뭘 어떻게 봐요, 어떻게 보긴."
운진의 조금 이상한 어투에 숙희는 잠시 어두웠던 마음이 열렸다. "또!"
"어차피 회사에나 밖에다가 피앙세라고 말했으면서, 뭘, 요."
"또, 우리 동거하느니 어쩌느니 그럴려고 그러지!"
"다들 그렇게 알아요."
"허!"
매장의 한쪽에서 결혼식 화환을 만드는 외국인 일꾼들이 이쪽을 흘끔흘끔 봤다.
운진과 숙희는 운서가 등을 떠미는 바람에 점심 먹을 겸 화원을 나섰다.
둘은 화교가 하는 중국 음식점으로 갔다.
주인여자가 능란한 우리 말로 주문을 받아 갔다.
숙희는 참았던 말을 결국 꺼냈다. "나, 너무, 자주 일 그만 두지. 응."
"안 맞으면 그럴 수도 있는 거죠."
"회사에서 다시 오라 하면 갈래."
"그렇게... 사람 갖고 노는 데를..."
"..."
"꼭 우리가 동양인이라서 함부로 한다기 보다는... 은행일이 결국 돈 장사니까, 돈 갖고 장난을 많이 치겠네요. 이리저리 돌려쳐야 꼬리도 붙고, 그 이자로 먹고 살려다 보니..."
"많이 남어."
"그러니 그런 빌딩들도 가졌겠죠."
"..."
"이글에서 숙희씨에게 뭘 하자는 겁니까?"
"어떤 추레이닝을 권장한다고... 그걸 배우면 회사와 회사끼리의 합병 같은 거를..."
"그런 걸 꼭 추레이닝을 받아야 한다면. 근데 이글이란 데가 저기 딴 주라면서요."
"그러니까."
"이사를 망설이는 겁니까?"
음식이 나왔다.
숙희는 음식을 먹으며, 하워드가 볼티모어 시 어디 금융회사로 옮겼다고 편지를 보내왔던 것을 기억해냈다.
차라리 거기를 알아볼까...
하워드가 좀 지나치게 접근했었지만 내가 잘 처세하면 되지않을까.
하워드는 모든 업무를 정식으로 처리하던 정통파인데...
숙희는 하워드에게서 일을 많이 배웠다고 동의한다.
그는 초보자인 숙희에게 텔러들 뒷관리부터 시작해서 키-퍼슨으로 키우고 나중에는 시니어 키-퍼슨이 자동차 사고로 죽자 숙희를 그 자리에 추천했을 정도였다.
그녀가 하워드의 노골적인 구애에 겁 먹고 자퇴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나는 그의 애도 낳고 어디 은행장 부인 소리 듣고 있었을래나.'
운진은 숙희가 온 정신이 딴 데 빠졌으면서 빈 젓가락질 하는 것을 지켜본다.
뭔가 심중에 갈등이 심한 모양이군.
혹 옛남자 친구란 자 생각하나?
운진은 그 자의 전화 번호를 콜러 아이디에서 베껴 놓고 있는 상태이다. 가겠으면 가겠다고 말하지? 집으로 들어간다느니 그런 엉뚱한 헛소리 하지 말고?
운진은 그 외 숙희가 뭔가 많이 숨기고 있다고 여긴다.
아닌 말로 다른 남자를 이미 택해놓고 헤어질 궁리를 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내가 그냥 먼저 보내줘?
그렇다면, 일을 만들어야 하겠지?
그는 숙희가 분명한 태도를 나타내도록 선수 치기로 했다.
최영란을 이용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