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희하고 끝난 거 아니예요?"
영진의 얼굴이 분해서 빨갛다. "두 사람이 왜 또 만나요?"
운진은 일순 뭐야 이거 했다. "오늘 만나자고 여기로 오라고 했대매요."
"저 기집애가 정말!"
"그래서 저는 일단 진희씨를 잘 대접하고 있던 중이죠. 일종의 아첨. 다리 좀 잘 놔달라고."
"아무리 그래도 진희 지가 나인 거 처럼 미스타 오하고 어떻게 술을..."
"맥주 갖고, 뭘요."
"집에선 미스타 오 얘기를 일체 못해요."
"그래요..." 운진은 속으로 영진은 옷벗겨 봤자겠다 여겼다.
"그래서 저도 안 해요. 오빠와만 말하고. 그걸 저게 약점으로 잡고."
"참! 미스타 김은, 오빠는 잘 지내요?"
"오빠도 미스타 오를 친했으면 해요."
"제 생각엔..."
"네?"
영진은 긴장되어 진희가 두고 간 맥주컵을 집어 들었다. 아, 나 술 못하는데.
"미스 킴은 우선 공부해야 하니까, 집에서 딴 데다 한눈 팔지 말고 열심히..."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되거든요. 저요, 진짜 무지하게 열심히 공부해요."
"그런 거 같아요."
"오빠도 저더러 공부 열심히 해서 얼른 집 떠나래요."
"왜... 딸인데도요?"
"그 때 되면, 오빠도 집 떠난대요. 지금은 제가 아직 어리구 학교 다니니까, 오빠라도 집에 있으면서 의지가 되어 주겠다구."
영진은 결국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목이 무척 마르다.
"그거 김 다 빠졌는데."
"웩!"
운진과 영진의 말이 동시에 얽혔다. 김 빠진 맥주는 정말 못 먹어준다.
숙희는 음식을 가질러 갔다가 운진과 마주쳤다.
운진이 목례를 보내며 숙희에게 먼저 하시라고 물러섰다.
숙희도 운진에게 목례로 답하고, 음식 두어가지를 접시에 담았다.
바람둥이 자식이 왜 바람둥인가 했더니 친절이 몸에 배었구만! 나쁜 사람! 인물값 하니? 이걸 그냥 한대 차 줘?
숙희가 제 자리로 돌아가니 한씨가 교대로 일어섰다.
"어이, 미스타 오! 미스타 오 아냐?"
한씨가 사람들을 개의치않고 소리쳤다. "여기서 만나네?"
숙희는 작은 짜증과 실망에 상을 찌푸렸다.
한씨가 운진의 악수하는 손을 안 놓아준다.
"자네 덕분에 매상이 많이 늘었네."
"아, 녜. 다행입니다."
"원래 경쟁자끼리는 그런 부탁하면 안 되는데 말야."
"경쟁은요, 뭘. 전 디 씨에서 하는데요."
"오늘은 우연히 만났으니까, 말고. 내 술 한잔 톡톡히 냄세."
"아, 녜, 녜!"
"담 토요일날 어때, 응?"
"녜, 녜!"
운진은 친절하게 게 다리를 부러뜨려서 살이 삐죽 나오도록 한 다음 영진에게 준다.
그러면 영진은 얼른 받아서 살을 쏙 빼먹고는 맥주를 한모금 마신다.
"저 오늘 술 첨 먹어요."
"녜..." 운진은 영진의 그 말을 벌써 골천번째 들으면서도 받아준다.
영진의 얼굴이 빨갛고 연신 웃는다. "맥주는 얼른 깨요?"
"뭐, 사람에 따라서요."
"저 술 깨기 전에는 집에 못 가요."
"금방 깨요."
운진은 이제 영진이 짜증스럽다. 지니, 어쩌면 화원에서 기다릴 걸?
운진이 병선과 함께 교회 성가대실에서 가운을 걸치고 있는데.
"안녀엉!" 진희가 뛰어 들어왔다.
운진은 사촌동생을 얼른 봤다.
병선도 사촌형을 보는 것이다.
진희가 병선의 옆을 살짝 건드리고 지나갔다. "맥주도 취하네요."
"무슨 말이야, 성? 성 보구 하는 말인 것 같은데?"
"몰라."
저 쯤에서 진희가 여성 대원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맥주도 취한다, 너?"
그런데 여성 대원들 몇명의 시선이 일제히 운진과 병선에게로 날아왔다.
"성을 보는데?"
"너 보는 게 아니구?"
"내가 맥주에 취해, 성?"
"난 맥주 먹구 취하냐?"
운진은 어렴풋이 짚히는 게 있다.
병선은 뭔가 사촌형이 의심스럽다.
그 날의 찬양 연습은 성렬의 실수로 자꾸 중단되었다.
미 이상에서 못 올라가는 것이다.
"그 부분만 발성내지 말고 넘어가죠?" 운진이 그렇게 제안했는데.
그리고 지휘자도 동의한다고 고개를 끄떡였는데.
성렬이 화를 벌컥 냈다. "미국에 하도 인재가 없다 보니 어중이떠중이 죄다 성가대에 올라온다고 껍쭉대나 본데, 입 다물고 잠자코 있지?"
병선이 먼저 반응을 보였다. "누가 할 소린지 모르겠네?"
"뭐?"
성렬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얻다 대고 맞먹냐!"
"루삥(roofing) 하면서 싸래기 밥만 처드셨나아, 말이 딱 반이네?"
병선이 일어서면서 가운을 벗어 던졌다. "그리고 여기 계신 분들이 모두 어중이떠중이네?"
운진은 병선의 청바지 자락을 가만히 잡았다.
병선이 사촌형의 눈치를 얼른 보고는 앉으려고 하는데.
성렬이 줄을 벗어나서 돌진해 왔다.
"하지 마라, 응?"
운진이 좋게 말했다. "나잇값 좀 하고."
성렬이 병선을 잡으려고 팔을 내뻗었는데.
누가 어디서 휙 날아가더니 성렬의 턱을 발로 찼다.
성렬은 사지를 활짝 벌리고 뒤로 나가 자빠졌다.
대원들이 모두 일어섰다.
운진이 지휘자에게 구십도로 절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는 성가대장에게도 구십도로 절했다. "죄송합니다. 다신 안 오겠습니다."
운진은 입었던 가운과 병선이가 벗어 던진 가운까지 합쳐서 클라짓에다 걸었다.
그리고 두 사촌형제는 성가대 연습실을 부지런히 빠져 나갔다.
성렬은 턱을 만지며 어리둥절해서 방 안을 둘러봤다.
그 날 성가대의 기도송이나 찬양이 엉망이었다. 아니.
전처럼 다시 엉망이었다. 아니.
전보다 더 엉망이었다.
남자들의 발성은 하나도 안 들리고 쏘프라노와 메조 쏘프라노의 발성만 온 본당 안을 째지게 울렸는데, 게다가 피아노 반주도 막 틀리고 하는 그런 대엉망이었다.
교인들이 목사의 설교도 아랑곳 없이 웅성거렸다.
단상 뒤에 줄 맞춰 선 성가대가 평소에 비해 반 밖에 안 되어 보이는 것이다.
목사도 설교 도중 뒤를 자꾸 돌아다 봤다.
성가대장은 아무 때건 큰기침을 했다.
지휘자는 혈압이 올라 목 뒤를 자꾸 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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