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아녀자분이, 허우대는 참 큰데... 맥은 팔십살 할머니야. 쯧쯧쯧쯧!"
체구가 한국 남자치고 엄청 작고 몸놀림이 방정맞은 한의가 한국 여인치고 덩치가 엄청 큰 숙희의 손목을 번갈아 짚으며 하는 말이다. "기가 아예 없네, 없어."
"뭘 잘 안 먹어요." 운서가 곁에서 거들었다.
"언니 되시는 분은 외관으로 봐도 건강한데, 동생분은 영..."
한의가 맥 짚는 것을 마치고 백지에다가 그림을 슥슥 그리며 못 알아볼 필체로 휘갈긴다.
슥슥 그리는 그림이 알고 보니 사람의 신체를 대강 표현하고는 화살표를 찍찍 긋는다. 그 여러 방향의 화살표들 중에 하나가 그림에서 사타구니께를 가리키고는...
"자궁이 이래 약해서는 태아가 들어앉지 못해. 수정이 되어도... 곧 떨어지고."
한의가 숙희의 왼손목을 또 짚고는 눈을 꾹 감았다. "장도 약하고. 그러니 뭘 먹어도 변이 잘 안 나올 뿐더러 또 잘 체하지."
그가 숙희의 손을 내팽개치듯 놓았다.
"덩치는 웬만한 남보다 큰데, 먹는 건 남보다 적으니 기력이 처질 수 밖에. 그러니 자연 모든 장기들이 몸무게를 맞춰 가느라 무리를 하는 거야."
그가 종이에다 못 알아볼 필체로 아마 한문이지 싶게 휘갈긴다. "혈압은 재보나마나 저혈압일 거고 하니까, 삼 하고 용 좀 넣고 푹 고아서 기부터 살려야 하는데, 우선..."
그가 연신 숙희의 맥을 번갈아 짚어가며 종이에다가 뭘 그린다.
"간이 무척 안 좋아..."
그가 고개를 저으며 혀도 찼다.
그가 숙희의 눈 밑을 손가락으로 눌러서 봤다. "내 그럴 줄 알았지. 술을 즐기나 본데. 술은 알콜과 물이지. 술이 속으로 들어가면 간이 알콜과 물을 분해해서, 물은 신장으로 보내져서 오줌으로 나가고, 알콜은 숨으로 해서 밖으로 나가는데."
숙희는 간이 아주 안 좋으니 그 알콜과 물 분해 작동을 못한다고.
그러니 술이 위에서 흡수되어 혈관으로 마구 돌아다니면서 뇌로도 가고.
한마디로 술에 못이기고 인사불성이 되는 거라고.
그러니 술에 곯아 떨어져서 정신을 잃어버리고...
"뇌가 취해 쓰러진 상태에다가 누가 뭘 어떻게 하는지 아나? 나중에 저절로 깨어나면 전혀..."
술 들어가기 직전만 기억하고 그 후로는 전혀 기억을 못 할 거라고...
그런데 숙희는 한의가 마구 내뱉듯이 지껄이는 말이 왜 그리 귀에 익숙할까.
마치 그녀의 행동을 다 지켜보고 하는 말처럼.
그녀는 술이 처음 들어가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러다가 술기운이 몸에 돌기 시작한다 하면 전혀 다른 짓을 한다.
최근까지는 운진과 대작하곤 했는데.
술기운이 얼굴에 올라오는 것 같으면 늘 그녀가 먼저 운진에게 대들었다.
그녀가 먼저 키쓰를 퍼붓고.
얼마 전에는 고민거리가 있다고 대작하고는 어깨선을 다 내놓고 소파에서 버둥대다가 바닥으로 굴러 떨어진 적도 있다.
그리고 그녀는 이튿날 잠이 깨면 누워있는 자리가 몹시 생소하다.
그녀는 늘 소파에 앉아서 술을 받았는데.
그녀는 잠 깨인 자리가 침대이기도 했고, 때로는 화장실 바닥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를 괴롭히는 한가지 기억이 있다.
전에 동료 여사원더러 데릴러 오라 해서 그녀의 아파트로 간 적이 있었을 때...
동료 여사원이 위로한다고 술을 주었다.
숙희는 그 술을 두 잔인가 받아 마시고 떨어졌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아파트를 그녀의 남자 친구가 툭 하면 드나든다는 것을 알았고.
어느 날 아침에 깨어 보니 백인 남자 하나가 건너편 소파에서 자고 있었다...
그래서 숙희는 그녀의 아파트에 묵는 동안 밤이건 낮이건 절대 눈을 안 붙였다.
그렇게 죽기살기로 있다가 운진이 찾아오는 바람에 탈출하듯 나왔던 기억...
그리고 화원으로 돌아와서는 만 이틀을 내리 잠만 잤던 기억...
그리고 그 이틀을 얼마나 험히 잤는지 그가 깨웠을 때 눈 뜨고 자신을 보니 셔츠는 말려 올라가서 젖이 다 나왔고, 바지는 어디로 갔는지 모른 채 팬티도 골반 중간쯤에 걸쳐져서 심지어 음모도 삐쭉 보였던 기억...
하지만 나는 술 없으면 잠을 못 자는데.
나는 술이 들어가야 불안한 마음이 가라앉고 진정되는데.
설령 알콜 중독이 되더라도 술 기운을 빌려야 잠도 자고 마음도 진정되는데.
이제는 운진씨 있을 때만 술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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