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숙희에게서 전화가 왔을 때, 운진은 영란과의 통화를 마악 끝낸 참이었다.
“어제 전화가 안 됐네요. 처음엔 아무도 안 받다가 나중엔 아버님이신가 본데 운진씨 집에 없다 그러시구. 또 조금 전까지는 계속 통화 중이더라구요.”
“아, 예. 누구랑 통화 좀 하느라구요.”
“졸업식장에 제가 좀 늦게 갔는데, 운진씨 안 계시더라구요? 일찍 가셨나 보죠?”
“아뇨? 늦게까지 남아 있었는데요?”
운진은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거짓말을 하며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요? 하긴 스태디움이 좀 커야죠. 사람들도 많고."
"그러니까요."
운진은 숙희와 통화하면서 영란의 어떤 말을 되뇌이고 있었다. 우리가 틴에이저들도 아니고 어쩌다 만나면 밥이나 먹고 영화나 보는 그런 시간낭비를 하지 말자는...
"졸업하셨으니 이제 뭘 하셔야죠.”
“그래야죠.”
“뭐 하고 싶으세요?”
“아직... 치이, 왜 빨리 취직 안 하느냐고 족치는 것보다 더 무섭네요?”
“어머, 그런 의도는 아닌데. 그렇게 들렸어요?”
“농담입니다.”
“그날, 제가 한턱내려고 했었는데, 아쉽게 놓쳤고, 이번 주말에 뭐 하세요?”
“주말예요, 음, 밀린 잠 좀 실컷 잘려구요.”
“그것도 좋죠. 혹, 운진씨, 골프 시작할 생각 없으세요?”
“골프요? 좋죠, 할 수만 있으면.”
“이번 주말에 같이 골프치러 가시겠냐고 전화했는데, 주무신다니, 틀렸네요.”
“미쓰 한 골프치세요?”
운진이 갑자기 미쓰 한이라는 호칭을 쓰니 숙희가 잠시 조용하다가 말을 이었다. “이 미쓰한, 아빠 따라 골프 나간 지 이제 두달 좀 됐어요.”
“오오, 아빠랑 딸이 같이! 좋네요.”
“네, 좋아요. 아빠랑 얘기도 많이 할 기회도 되고.”
“와아, 그림 같네요?”
“아빠가 운진씨를 좀 만났으면 하시는데요.”
“절요? 어어, 전 그 때 툇짜맞고 아직도, 겁이 나는데요? 아버님은 더 무서우실 거 아녜요.”
“아, 그러시진 않아요. 그 날은 엄마가 하도 나서니까 다투기 싫으셔서 이층에 가만히 계셨대요. 그리고 아빤 대체로 엄마한테 모든 결정을 맡기시거든요. 근데, 아빠랑 골프치면서 제가 좀 떼를 썼어요.”
“아빠들은 딸한테 약하다면서요.”
“네, 특히 울 아빠는. 특히 저한테.”
운진은 한 중령의 이중성이 그려졌지만 아무 것도 모를 숙희라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네, 가서 뵙겠읍니다. 저도 아버님한테 떼 좀 쓸까요?”
“그러시든지요. 그럼, 이번 주말에 나오시는 거죠? 그 동안 못 만나서 저도 할 얘기가 많아요.”
“전, 그 날 이후로, 숙희씨께 연락하는 게 예의가 아니다 해서 잠자코 있었어요.”
“예의가 아니다뇨? 그럼, 우리 끝난 사인가 보죠?” 숙희의 어조가 조금 강해졌다.
운진은 그녀의 표정을 상상하며 말을 이었다. “일단은 시간을 벌어 놓는 게 모두에게 이로울 것이라는 생각을 했읍니다. 숙희씨는, 제가 잘 모르지만, 어머니에게 심한 감시를 받을 테고 혹시 야단도 맞았을 텐데, 제가 자꾸 연락을 취하면 숙희씨가 가운데서 얼마나 곤란하셨겠어요. 솔직히 전화도 몇번 했었어요. 앤서링만 나오더라구요. 그래서...”
“하여튼 자세한 얘기는 만나서 해요.”
일단 통화를 거기까지 하고 마치니 저녁 때가 넘었다.
운진은 갑자기 두 여인 사이에 끼어서 방황하는 사나이처럼 여껴졌다. 이런 걸 소위 행복한 비명이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그리고 그는 건방지게도 숙희씨와 영란씨를 비교해 보기 시작했다.
숙희가 아빠 아빠 하고 부르는 한 중령을 운진은 다른 경로를 통해 잘 안다. 다시 말하면 다른 세상에서 두 남자는 종종 마주쳤었다. 운진은 여러 번에 걸쳐 숙희를 불행에서 구해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번번히 실패했다. 그 이유는 숙희가 아닌 말로 타고 난 팔자 내지는 운명을 바꾸거나 이겨보려고 애쓰지 않기 때문이었다. 제 삼자가 곁에서 아무리 애써 봐도 정작 본인이 무감각이니 무산되는 것이었다.
운진은 그런 숙희를 놓아주고 피하는 방법은 영란과 빨리 일을 벌리는 것 뿐이라고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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