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두개의 세상 pt.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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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작은 사내의 쉼방 2024. 8. 10. 04:30

   그러나 운진은 숙희와 만나기로 한 날, 운동화에 편한 옷으로 입고 약속 장소로 갔다. 
집 동네에서 좀 떨어진 어떤 도넛가게였다. 
숙희가 손짓하는 곳으로 가니 챙 넓은 모자에 검은 뿔테 안경을 쓴, 눈초리가 아주 제법 무서운, 남자가 쳐다봤다. 그리고 보니 실제로는 물론 그렇지 않지만 숙희가 분위기나 제스처가 부친과 많이 닮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어쩐지 딸을 그런 운동을 시킨다 했지…’
운진은 반사적으로 구십도 깎듯이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숙희부는 좀 거만하게 인사를 턱짓으로 받았다.
숙희가 자신의 부친 옆에 앉은 채로 운진에게 맞은 편자리에 앉으라고 가리켰다.
운진이 앉고 나니 그녀의 부친이 말을 던졌다. 
   “금방 한 말을 영어로 해 봐.”
   “안녕, 하십니까 그거 말씀이십니까?”
   “지금 그 말 말고 또 한 거 있어?”
   “아, 예. 음, 하우 아 유, 써?”
   “음, 써를 붙일 줄 아누만. 자기 소개를 영어로 해 봐.”
   “예, 예. 음, 마이 네임 이즈 오운진, 운진 오! 마이 에이지 이즈 투워니 에잇? 아 워너 매리 유어 도러?”
   “헛, 자식! 영어로 하래니까 댓자로 결혼 시켜달래네? 근데 말끝을 왜 올리냐? 그거 아주 나쁜 화법이야. 듣는 사람이 아주 기분 나뻐. 왜, 너 알어? 몰라? 잘 들려? 이런 말투로 들린단 말야.”
   “녜, 조심하겠읍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긴장이 돼서.”
   “그럼, 긴장해야지! 어떤 자린데!”  
운진은 숙희가 입을 가리고 웃는 걸 봤다. 
운진은 두 손을 바지에 슥슥 문질렀다.
   “이번에 졸업했대매?”
   “녜.”
   “그래서, 무슨 일을 할 건데?”
   “녜. 몇 군데 써 넣었는데, 연락이 곧 오겠죠. 아니면 제가 다시 연락해 보던가, 할 겁니다.”
   “음! 그래야지. 요즘에 취직하기가 얼마나 힘든데. 가만 있으면 밥이 저절로 입에 들어오나?”
   “녜.”
   “우리 숙희랑 결혼하면 시집살이 시킬 건가?”
   “아무래도 제가 외아들이라... 누이 하나 밖에 없거든요. 누이가 한국에서 아직 못 들어오고 있는데, 조금 있으면 애들 둘 데리고 오지만 따로 살겠죠.”
   “외아들이라 부모를 모셔야 된다, 그 말이지!”
   “죄송합니다.”
   “죄송은, 무슨 죄송. 숙희도 다 알면서 덤비는 건데, 뭘. 얜 여동생 하나 밖에 없어. 걘 시집갔지. 근데 얘 마저 가고 나면 우리 내외뿐인데, 흠. 들어와 살 생각은 없나?”
   “생각 안 해봤는데요. 그리고 그건 숙희씨와 상의를... 안 해봤는데요.”
   “그냥 물어봤어. 나두 귀찮아. 이왕이면 아주 머얼리 데려 갔으면 좋겠는데? 일년에 한두번이나 보게. 우리 숙희가 하도 만나보라고 해서 자넬 보자 했는데. 난 그렇다. 느이 둘만 좋으면 됐지, 난 이래라 저래라 간섭 안 한다. 우리네 운동한 사람들은 그거 하나는 앗살하다.”
   "녜."
   "자네 남잔데, 무슨 운동 같은 거 한 거 있나?"
   "운동요?" 
   운진은 숙희를 봤다. "무슨 운동... 말씀이십니까?"
숙희가 부친의 팔소매를 가볍게 당겼다. "아빠. 내가 그랬잖아. 운진씨는 폭력 같은 거 안 좋아한다고."
   "운동이 폭력이냐?"
운진은 웬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고 뭣 같은 기분이 되었다. 어딘가 모르게 썩 익숙한 부녀지간 같지 않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숙희씨의 아버지란 이가 겉으로는 똥폼을 잔뜩 재는데, 어딘가 모르게 무식끼가 흘렀다. 
   이번 세상에서도 이 인간은 일자무식에 사기치는 거야?
운진은 한 중령을 폭행하기도 하고 다른 이의 손에 의해 죽게도 했던 그런 세상들이 싫어서 제대로 된 순서를 밟아보고 싶었는데 또 아닌가 했다. 저 여자는 이번 세상에서도 막 사나?
아닌 말로 우리가 이루지 못 하니 비탄에 빠져서 막 살기를 택했던...
운진은 숙희를 놓아줘서 멸망의 길로 들어서지 않기를 바라자고 다짐했다.
   놓아줘도 똑같은 팔자의 길을 걷는다면, 그건 그대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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