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두개의 세상 pt. 01

pt.1 10-7x097

키 작은 사내의 쉼방 2024. 8. 10. 04:28

   운진은 아무래도 숙희에게 큰 실례를 하는 것 같다는 생각에 마음이 안 좋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그러한 것은 영란의 말이 계속됨으로써 쑥 들어가버렸다.
   "저는 외과를 하고 싶었어요."
   “외과 계통요?”
   “네! 호호호! 저 그런 거 좋아해요. 인명을 살리는 그런 일. 우리 부모님 꿈이 너무 높아요. 딸이 세계 무대에 서는 걸 꿈꾸신 모양인데. 처음엔 못 해 드리는 게 죄송하구 미안했는데, 이젠 아녜요.”
   “동생…은, 잘 해 나가요?”
   “우리 영아요?”
   “녜.”
   “걘 머리가 좋아요. 근데 노력을 안 해요. 지는 시집이나 일찍 간대요. 열네 살짜리가 아주 응큼해요. 지는 어쩌면 하이스쿨도 안 마치고 시집 갈 만한 데가 나오면 간대요.”
   “집에 딸만 둘입니까?”
   “아뇨. 한국에 남동생이 하나 있어요. 내년에 들어와요. 지금 군대에 있거든요.”
   “온 가족 이민이면 일찍 제대가 될 텐데요.”
   “그건 불명예라고 다 마치고 온대요. 휴학 중인데, 걔도 어쩌면 제 짝 날 지 몰라요. 걔도 어중간해서...”
   “저도 안 올 수도 없고 해서 따라 왔는데, 미국 생활이 너무 힘듭니다. 저의 삼춘처럼 그냥 무슨 꽃가게 매네저나 할 걸 괜히 학교를 다닌다고 2년을 허송세월로 보냈어요. 제 나이 이래뵈도 벌써 스물 여덟이거든요. 남들 같으면 벌써 장가갈 나이인데, 아직 잡(job)두 없구, 막막하네요.”
   “운진씨, 우리 오늘 술 먹으면서 속엣말 실컷 해요. 어디다 하소연두 못 하구 저두 아주 미치겠어요. 혹시 여자가 술 먹는다고 싫어하는 그런 구닥다리는 아니시겠죠?”
   “아, 아뇨! 이래뵈두 저 깨인 사람입니다. 전 결혼하면 마누라와 맞담배 필 겁니다.”
   “네에? 아이고오!”
   “재떨이를 가운데 놓고 마주 앉아서 담배 피면 괜찮을 거 같은데요?”
   “글쎄요오? 여자라고 담배 피우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좀 그러네요.”
   “담배 피우면서 술잔 주거니 받거니, 좋죠, 뭐.”
   “나쁘진 않겠네요. 누가 운진씨 부인이 될 지 모르지만.”
   “상상으로야 뭔 소린 못하겠읍니까? 좋죠.”
운진이 한숨을 내쉬는데 영란이 조금 언짢은듯 눈썹을 찡그리다가 이내 폈다.

   둘은 실버스프링이란 동네에 있는 제법 큰 규모를 갖춘 한국식 식당에 가서 방 하나를 달라고 했다. 
윈래는 큰 손님을 받을 때 쓰는 방인데 영란이 매니저에게 오늘만 특별히 졸업 축하라서 부탁한다고 애교를 부려 방의 반을 가르고 얻었다. 
큰 식탁에 둘이 마주 앉았는데, 영란이, "벌써 덥네요?" 하며 겉에 걸친 옷을 벗었다. 
소매 없는 까만 윗도리가 하얀 살결에 대조되어 강렬하게 느껴졌다. 
거기에 가늘게 걸린 금목거리가 오히려 시야를 자극했다. 
운진은 냉수를 벌컥벌컥 마셨다. 
만일 숙희가 보면 지금 뭐 하냐는 거냐고 야단을 칠 텐데, 운진은 이상스레 영란에게 끌렸다. 숙희보다는 영란이 모든 면에서 수월할 것 같았다. 
숙희의 모친한테서는 이미 두 차례 망신을 당했다. 
그런데 영란의 부친은 학교 후배라고 친근히 대해주지만 딸과의 교제도 은근히 권장하는 눈치였다. 
미쓰 최의 모친만 좋게 나오면 차라리 이쪽이 나을 성 싶었다. 
   ‘이상하네. 왜 꼭 엄마들이 날 싫어하지?’ 
그 날 운진과 영란은 술도 마시고 요리도 몇차례 시켜 먹으며...
옛날 학창 시절 때의 에피소드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게 지냈다...

   운진은 집에 가서야 어떤 여자에게서 즉 숙희에게서 여러 차례 전화가 왔었음을 전해 들었다. 
운진은 부모로부터 전화하라는 말을 듣고도 버텼다.
숙희가 그에게 그랬다. 퇴근을 좀 일찍 해도 길이 밀릴 테니 아무리 빨리 간다 하더라도 식 진행하는 것은 못 보고, 대신 끝나면 저녁이나 하자고. 그러니 미리 출발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운진은 부모네가 혹시 전화 온 여자에게 즉 숙희에게 아들이 다른 여자와 어디 갔다고 말했는지 궁금했지만 구태어 알아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럴 분들이 아니지만 설령 그랬더라도 상관 않기로 했다.
그는 그렇다고 숙희를 치우고 영란과 어떻게 해 보자는 것도 아니었다.

'[소설] 두개의 세상 pt. 01' 카테고리의 다른 글

pt.1 10-9x099  (0) 2024.08.10
pt.1 10-8x098  (0) 2024.08.10
pt.1 10-6x096  (0) 2024.08.10
pt.1 10-5x095  (0) 2024.08.10
pt.1 10-4x094  (0) 2024.0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