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날 점심 때 설이가 음식 쟁반을 들고 숙희 옆으로 왔다.
며칠 전 무안을 당하고도 접근하는 걸로 봐서 성격이 무던한 모양이다.
설이는 작은 사이즈의 샐러드와 물이 전부였다.
“너 무슨 다이어트를 그리 무섭게 하니?" 숙희가 말을 건넸다.
“안 먹어도 배가 자꾸 나와요.”
“그래도 몸에 영양은 섭취해 줘야지.”
“라면을 많이 먹어서 그런가 봐요.”
“라면을 많이 먹니?”
“뭐, 싸구, 쿡하기 쉬우니까요.”
설이의 그 말이 숙희에게는 라면이 간식이 아니라 주식이라는 말처럼 들렸다.
‘하긴, 얘 혼자 벌어서 누구 코에 부치나... 아파트 세도 만만치 않을 텐데?’
숙희는 파스타 샐러드와 갈릭 브레드의 점심을 설이에게 나주어주려고 딴청을 부렸다. “사실 시키고 보니 이따가 미팅이 있는데 냄새 나겠다, 그치.”
“갈릭 브레드요?”
“샐러드에 드레씽도 너무 많이 넣었나 봐.”
“크크. 칫솔 안 갖구 다니세요?”
“오늘 안 갖구 왔다. 배는 고픈데. 얘, 니가 좀 덜어가라. 안 먹긴 못 하겠고.”
“주세요.” 설이가 금새 비운 플래스틱으로 된 샐러드 그릇을 내밀었다.
“껌 있니?”
“제가 사 드릴 께요.”
숙희는 설이의 재빠른 손놀림을 경탄의 눈빛으로 지켜봤다.
금새 음식을 반 갈라서 나누고 포크와 나이프를 숙희 앞으로 돌려놓는다.
“너, 시집가면 살림 정말 잘 하겠다!”
“그렇죠? 근데요, 전, 돈 많이 벌어서 식모 두고 살 거예요. 지겨워요. 밥 하러 부엌에 들어가는 게.”
“그러니?”
“열 살 때부터 제가 밥 빨래 하면서 학교 다녔어요.”
설이의 그 말에 숙희는 새삼스럽게 설이의 손을 내려다봤다. 그러고 보니 처녀의 손이 일살이 붙어 울퉁불퉁하다. 손톱도 다 닳아 빠지고 손끝이 뭉툭하다.
저 나이에 얼마나 멋을 낼 텐데. 손이…
“너, 내가, 너랑 네 동생 허쉬 파크에 데려간 거 기억나니?”
“저번에 말씀하시고 나서 집에 가 보니 사진이 있더라구요. 그 때 제가 아마 네살인가 그랬죠?”
“집에 사진이 있니?”
“네. 삼춘이랑 찍은 거... 그거, 아줌마도 있든데요?”
“아, 맞다. 그래, 거기서 사진 찍었어.”
숙희는 새삼스럽게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당시 숙희는 싫다고 사양했는데 오운진이란 사내가 부득부득 우겨서 찍힌 사진이 그 집에 여태 있다니.
‘얘가 속으로 날 얼마나 비웃을까? 이중인격자라고 흉보겠지? 솔직해 버릴까? 어쩌면 날 바보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벌써 다른 여자와 결혼해서 살고 있는 삼춘의 사진을 이십년이나 갖고 있는 나를.’
“아줌마.”
“응, 응?”
“저도, 아줌마처럼, 한 남자만 알고 사랑하고 싶어요.”
숙희는 속이 뜨끔했다. “나처럼이라니?”
“한 남자를 알았다가 이루지 못 하니, 차리리 독신으로 지내는, 그런 사랑을 하고 싶어요.”
“칭찬이니, 아님 흉이니?”
숙희는 조카뻘 앞에서 무안함에 그렇게 말했는데, 설이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저, 칼리지 다닐 때, 남자 친구가 있었는 데요. 걘 저를 좋아했지만 전 걔를 사랑했는데요. 걔네 엄마는 제가 천하게 생겼다고 절 싫어했어요. 아마 키가 작아서 그랬나 봐요."
설이가 마치 회상을 하는듯 표정이 차분해졌다. "걔랑 헤어지구, 죽고 싶었는 데요, 가만 생각해 보니까 왜 저만 죽어요? 걔는 어쩌면 딴 여자랑 어울릴텐 데요? 허! 내가 바보예요? 그래서 악착같이 더 살기로 하고 맘을 고쳐먹었죠.”
설이의 그 말에 숙희는 속으로 난 아닌데 했다.
"그 남자요, 아직 연락 오는 데요, 제가 싫다고 했어요."
아직도 혼자래? 숙희는 물론 그 말을 속으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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