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맘이 편해졌어요,"
“언젯적 얘기니?” 숙희는 묻고 겸연쩍게 웃었다.
“헤헤. 아줌마처럼 이십년은 안 됐구요. 이년요.”
“이십년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니?”
“엄마가 말해줬어요. 엄마 말이, 삼춘이 나쁘대요. 반항심만 있구, 엄마 말에 의하면, 삼춘은 지금 이혼하려는 숙모와 결혼했을 때, 순전히 아줌마에 대한 반항심으로 잘 알아보지도 않고 했대나 봐요.”
숙희로서는 처음 듣는 얘기다. "뭐?"
“아줌마는 이십년을 혼자, 슬퍼하며 사시는데. 엄마 말에 의하면, 지금 삼춘은 죄 받는 거래요. 아줌마를 이렇게 되게 했기 때문에.”
숙희는 속으로 웃었다. ‘야! 나는 내 엄마에 대한 반항심에 결혼 안 하고 혼자 산다. 엄마가 하라한 남자와는 절대로 못 살 것 같아서. 날 아주 크게 봐 주네. 슬퍼하면서 혼자 산다니...’
"웃으시네요."
“얘, 설이야.”
“네?”
“너, 술 먹을 줄 아니?”
"그런 거 대답해도 저 안 짤리죠?"
"그래!"
“조금요. 왜요?”
“얘, 우리 이번 주말에 술 먹을까? 나 너랑 친구하고 싶은데.”
숙희는 그렇게 말하면 설이로부터 치사한 아줌마 같다는 핀찬을 속으로 들을 것 같았다.
그러나 설이는 순순히 나왔다. “네, 좋아요!”
“그래. 그럼, 내가 이따가 너한테 이-메일로 주소 가르쳐 줄께. 시간두 정하구.”
“네!” 설이가 코 끝을 찡그리며 흐흐흐 웃었다.
“야, 이 아줌마 태권도 삼단인데, 아까 니가 말한 그 남자애의 엄마가 너 보고 천하게 생겼다 했대매? 내가 때려줄까?”
“우와아! 삼단이요? 와아, 정말이세요?”
“그래. 나 니네 삼춘도 몇번 때려줬다?”
“에이. 그러셨으니까 우리 삼춘이 반항심에 딴 여자와 결혼을 했죠. 남자를 때리면 안 되죠! 남자들 존심이 여자보다 더 쎄요. 남자들 얼마나 속알딱지들 없는데요!”
“그러니?”
“걔도, 글쎄, 첨엔 하루 아침에 모른 척 하더라니까요? 여자에 대한 예의라나 뭐라나.”
“너한테 오늘 대단한 거 배웠다. 남자 존심이 여자보다 쎄다.”
“네. 에이, 그건 아줌마가 잘못하신 건데요? 특히 우리 삼춘은 존심이 되게 쎄요. 욱 하는 승질도 있구. 전 어떻게 된 건지 인제 알 것 같애요. 아줌마가 우리 삼춘의 존심을 무참하게 밟아놓으셨구, 삼춘은 그 욱 하는 승질에 아무 여자하구 결혼했구. 그거네요. 이십년 전에 제가 말만 할 수 있었어두 두 분을 잘 도와 드릴 수 있었을 텐데.”
‘지금도’, 하려다가 숙희는 웃으며 먹고 난 빈그릇을 챙겼다.
설이가 얼른 빼앗듯이 받아다가 버리러 갔다.
‘욱 하는 승질에 다른 여자와 결혼했다? 반항심도 있었고?’
숙희는 이십년 만에 수수께끼가 한번에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결론은, 내가 운진씨의 자존심을 건드려서 이렇게 됐다는 얘기로군. 플러스, 나의 엄마에 대한 반항. 참 나도 대단하네. 이십년 만에 스물네 살짜리한테서 대답을 듣구.’
설이가 멀리서 고개를 까딱해서 인사를 하고는 사라졌다.
‘그 때 난 스물일곱이었잖아. 그 때 난 뭘 생각한 거지?’
숙희는 설이가 사라진 방향을 쳐다보며 입술을 깨물어 울음을 참았다. ‘남자들은 예의상 헤어진 여자와는 연락을 절대 안 한다고? 헤어지자 해도 계속 연락 오고 귀찮게 구는 남자들은, 그러니까 예의가 없어서?’
예의란 말은 운진이 꽤 써 먹은 말이었다. 그리고 그는 민폐란 단어도 참 많이 썼다. 종합해 보니 예의상 민폐 끼치는 짓을 안 하려고 그렇게 간단히 돌아섰다는 말인가?
우리의 관계, 그게 예의에 어긋나고 민폐 끼치는 일인가?
'그런데! 우린 어떻게 헤어진 건데?'
숙희는 속으로 고함을 질렀다. '나만 가서 기다리다가 포기한 건데. 운진씬 다른 여자와 결혼하고.'
까페테리아가 빠르게 비어가기 시작했다.
숙희는 그제서야 창으로 환한 빛이 들어오는 것을 알았다.
그러고 보니 하늘이 개이는 것이었다.
그녀의 휴가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연일 짖궂었던 날씨가 이제서야 물러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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