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희는 설이를 굳이 피할 이유가 없다고 자신을 타일렀다.
설이는 다행히 요즘 아이 치고도 탁 트인 애같다. 어른에게라고 듣기 좋은 말만 하려는 것도 아니고 제 생각이나 느낌을 서슴없이 말하는 데에서 숙희는 자신이 이십대였을 때 미처 못 깨달았던 것들을 배운다.
그래서 숙희는 점심 시간에 일부러 사람들 눈에 잘 뜨일 자리에 앉아 설이를 기다렸다.
설이가 멀리 지나가다가 숙희가 손짓을 하자 방향을 바꿔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앉어. 오늘은 푸짐하네?”
설이는 아마도 치즈버거 같은 샌드위치에 소다를 가졌다. “네. 아유! 다이어트 포기했어요.”
“잘 했다. 먹거 싶은 거 실컷 먹고 그 대신 운동을 해서 빼야지. 생으로 굶으면 병 생겨.”
“네. 호호.”
“너, 뭐, 그리 뚱뚱한 것도 아닌데 뭘.”
“아, 이 키에 싸이즈 싴스면 뚱뚱하죠. 아줌만 싸이즈 몇이세요?”
“싴스.”
“아줌마가 그 키에 싴스이신데, 제가 싴스면 뚱뚱한 거죠.”
“싴스면 싴스지, 키 따라 가니?”
“네.”
“근데, 니네 아빠는 뭐 하셔?”
“울 아빠요. 엄마가 아직... 금새 마음이 돌아서겠어요?"
"그게 무슨 말이야?"
"아... 아빠... 저희랑 따로 살아요."
"저... 런!"
"그리고 마잌이 다시 합치는 거 싫대요. 가족 버리고 나간 사람이라고... 마잌이 좀 그래요. 전에는 얼굴 보러 오더니 이젠 돈도 메일로 부치고 그런다고요.”
“내성적이래매?” 숙희는 하마터면 ‘삼춘처럼’ 이라고 덧붙일 뻔했다.
“네. 그리고 그 쪽에 여자의 애들이 있어요. 둘. 걔네들을 맡아야 하잖아요. 마잌이 아빠 욕을 하면서 난리예요. 우릴 이용하려구 그런다구 절대 안 된다구, 어휴, 말도 마세요.”
“넌?”
“전 그 쪽 애들을 알아요.”
“오, 만나고 했나 보지?”
“아뇨. 봤어요. 어디 놀러갔다가 우연히.”
숙희는 전혀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설이를 보고, ‘암만 요즘 아이지만 지나치게 객관적이잖아?’ 했다.
숙희가 그런 환경이라면 자신은 어떻게 행동했을까 생각해 보니 설이처럼 못 할 것 같았다.
숙희는 그들을 미워할 것 같았다.
그들을 만나기만 하면 태권도로 때려줄 것 같았다.
설이는 샌드위치를 너무나 맛있게 먹어치웠다. 옆에서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 지경이었다.
“제가 너무 먹죠. 큰일이예요. 입에서 땡기는데 하자는 대로 했다간 큰일 나겠어요.”
“그리 맛 있니?”
“네.”
“나도 다음에 그거 먹어봐야겠다.”
“잡숴보세요.”
며칠 전까지만도 점심을 시원찮게 하더니 갑자기 주머니 사정이 좋아진 걸까, 숙희는 설이의 아구아구 먹어대는 모습을 보다가 끝내 운진의 소식을 묻지 못 했다.
‘지금 와서 뭘 어떡하자구, 새삼스럽게.’
이 날 따라 설이는 삼촌의 말을 전혀 하지 않았다.
숙희는 그이가 아무래도 설이를 앞에 세우고 작당하나 싶었다.
그 날 뿐만 아니라 설이는 계속해서 삼촌에 대해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숙희는 운진에 대한 궁금증을 떨쳐버리기로 했다.
그리고 숙희는 설이와 직장 동료이자 회사 내에서 유일한 한국인 벗이 되기로 하였다.
설이가 그 새 번 돈으로 십년 지난 미제차를 사서 몰고 다닌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차가 툭 하면 발동이 안 걸리고 길에 가다가 툭 하면 시동이 꺼진다는 것도 알았다.
그리고 할머니가 결국 노인 아파트로 도로 나갔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숙희는 설이가 저녁 초대를 하고 싶다고 했을 때 쾌히 응하지 않았다.
"차차 시간을 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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