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다가오면서 사내에 또 한번의 불길한 소식이 돌았다.
어쩌면 회사가 서부의 어떤 회사에게 곧 팔리게 되고 무지무지한 감원이 단행될 거라는 소문이었다. 어쩌면 지금의 건물이 통째로 비우게 될지도 모른다는 충격적인 정보가 돌았다.
쑤는 중역인 관계로 굳게 닫힌 커튼 뒤에서의 회의에 참석했다. 제프까지도 목이 잘리는 합병이지만 쑤는 살아남을 것이라는 귀뜸에 VP 급 임원들이 부러운 한숨을 보냈다.
단 한가지 조건은 숙희의 서부로의 인사발령이었다.
회의를 끝내고 나오면서 제프가 쑤에게 보직은 똑같은 인사부 VP를 유지할 것이라고 귀뜸해 주었다. 이유는 그녀가 인사문제에 전혀 부정이 없고 평점이 늘 상위권에 들었었기 때문이라 했다.
서부에서 그런 사람을 필요로 한다고 했다.
제프는 이 참에 자신의 여태껏 구상해 온 비지네스를 시작해 볼 예정이라고 했다.
쑤는 5 년만 더 근속하면 은퇴할 수 있고 연금을 타 먹을 수 있다. 아니.
지금이라도 개인적으로 은퇴를 할 수도 있다. 그 동안 모아놓은 돈을 까 먹으면서 있다 보면 은퇴가 되고 정년퇴직까지의 포인트를 다 채운 것보다는 적겠지만 얼마정도의 연금을 기대할 수있다.
‘이 참에 은퇴해 버려?’
이 날 퇴근한 숙희는 꼬냑 한 잔을 기울이며 설희에게 전화를 할까말까 고민했다.
합병이 끝나면 지금의 빌딩에서 근무하는 모든 직원이 실직된다.
숙희는 계속 일하기 원한다면 대륙의 반대편으로 이사를 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설이와 헤어져야 한다. 사실 설이를 만남으로써 운진이라는 남자의 소식을 다시 듣게 되었지만 만일 숙희 본인이 원했었다면 그까짓 사람 하나의 근황을 알아보는 것 쯤이야 전화 몇통이면 충분했었을 것이다.
그가 살던 집으로 찾아갔었을 수도 있었다.
예전에 나가던 교회로 가 볼 수도 있었다.
숙희의 진실은 단지, 그와 마치 새끼 손가락을 걸고 약속한 듯이 꼭 지킨 것처럼 기다린 세월이 비단 그에게 향한 순애보는 아니었다는 것.
즉 일종의 세상과의 불타협이었다.
숙희는 자기 자신을 너무도 잘 안다.
숙희라는 여자는 어느 한 남자의 그늘에서 살림이나 하고 애나 낳고 잠자리에서 남편의 손길을 기대하는 그런 게 결혼생활이라면 상상도 하기 싫어했다.
그것은 비단 운진이란 남자와 이별한 충격에 그녀의 몸과 마음이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젊어서부터 숱한 남자들과 염문을 뿌리고 다니고, 심지어 입으로 표현 못할 정도까지의 성노예 생활을 했다면, 그것은 그녀를 어려서부터 키워준 계부 한 중령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위선적인 가부장적 위신이 숙희로 하여금 남자 남편 가장에 대한 불신을 일으키게 했다.
교회에서 보직을 맡았다고 으시대고, 앞에 나가서는 경건히 머리 숙인 교인들을 대신해서 기도하는 아버지도 돌아서면 세금을 적게 낼 요령을, 아니, 떼어 먹을 방법을 궁리하고, 물건을 속여 팔고, 뭇 젊은 여자를 보면 엄마 몰래 눈알을 휘번덕거렸다.
오래 전부터 두 양반이 각 방을 쓰는 이유를 생각해 본 숙희는 결국 아버지의 그 눈알을 휘번덕거리는 습성이 어떤 과오를 범하지 않았나로 결론을 지었다.
두 분이 헤어지게 된 동기를 숙희의 남자 선택 때문이란 것은 후에 두고두고 울거먹을 구실 같았다.
동생 공희를 보면 숙희는 결혼생활이라는 것에 더욱 회의를 가져왔다.
공희는 네 아이들의 뒷치닥거리에 밀려 제 몸가짐을 추스릴 시간도 없다. 그녀는 늘 자다 일어난 머리를 하고 입에서는 늘 냄새가 났다. 어쩌다 만나면 늘 궁상을 떨고 이 핑게 저 핑게로 돈을 뜯어갔다.
동생의 셋째를 마치 양녀처럼 삼아 그 애의 자라는 것을 지켜보는 즐거움 외에는 딱히 왕래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제부란 사람도 맘은 착한데 진득함이 없어 늘 날품팔이처럼 일자리를 한달에도 과장되게 말하면 수십번씩 바꾸는 모양이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식구들 입에 밥이 들어가게 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고 도리라는 것을 아는지 그래도 두잡 세잡 뛰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또 그렇게 일한다.
소위 만물박사치고 배고프지 않은 사람 없다더니 제부가 딱 그런 축에 든다.
핑게 김에 뜨자!
숙희는 캘리포니아 행이 어떤 기회 같았다. 핑게 김에 설이와도 헤어지고.
그리고 그녀는 혹 은행이 합병되어 없어지기 전에 캘리포니아 주의 본사로 미리 갈 수 있는지 알아보기로 마음먹었다. 행여 운진을 만날 우연이 벌어지기 전에 가려고.
제프가 완전히 헤어지기 전에 딱 한번만 잠자리를 원한다고 타진해 왔다. 잘 하면 캘리포니아로 가서도 편한 자리를 맞도록 힘 써 줄 수 있다는 실을 뒤에 매달았다.
쑤는 그걸로 또 고민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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