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두개의 세상 pt.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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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작은 사내의 쉼방 2024. 7. 28. 03:43

   그녀의 기억 속의 그 날도 비가 억수로 왔다. 
아마도 금요일이었다. 그랬다. 
이틀 후에 있을 부활절 찬양 준비 때문에 주말에도 남녀 성가대원들은 직장이나 학교를 마치고 저녁에 교회로 모였다. 그 날이 최종 연습이라 모두 모여야 했다.
메조 소프라노에 소속된 숙희는 그날 따라 늦게 퇴근이 되어 운전하는 차 안에서 빵을 먹으며 부랴부랴 교회로 오고 있었다. 
그녀는 차를 교회 주차장에 세우고 내리는데 한손엔 백을 잡고 또 한손은 마시던 콜라를 마져 마시고 악보를 챙기랴 책으로 비를 가리랴 허둥대다가 손에 든 것들이 몽땅 떨어졌다. 악보가 날아가 빗물에 담겨지고 백이 물에 떨어지고 손에는 다아 마시고 빈 콜라 컵만 남았다. 
그녀가 치마가 차 문에 끼어 몸을 돌리지도 못하고 쩔절매는데 마침 추럭 한대가 주차장으로 들어오다가 길 한복판에 섰다. 
그녀의 차가 진입로를 가로막은 것은 아니었다. 
숙희는 쏟아지는 빗줄기에 눈을 제대로 못 뜨고 그 추럭이 왜 길복판에 서나 보려 했다. 
치마만 문에서 빠져도 어찌 해보겠는데, 악보는 이미 물 속에 잠겨 떠 다니고 백을 집으려는데 문에 끼인 치마 때문에 구부릴수가 없다. 더 구부리다가는 치마가 벗겨지거나 찢어질 우려가 있었다.
추럭 문 열리는 소리가 나고, “자요, 자요!” 하는 남자의 음성이 들렸다.
숙희는 빗줄기 속에서 손으로 머리를 가리고 소리가 난 쪽을 보려고 몸을 트는데, 우산이 받쳐졌다. 그제서야 손을 치우고 보니 남자 하나가 우산을 잡으라고 우산대 쥔 손을 흔들었다. 
숙희는 엉겹결에 콜라 컵을 떨어뜨리며 우산을 받아 받쳤다. 
그 남자가 땅에 떨어진 차 열쇠를 주워 차 문을 열어주었다. 
비로소 숙희는 치마가 빠져서 몸을 돌릴 수가 있었다. 
그 남자가 뛰어다니며 백을 주워오고 책도 주웠다. 
악보는 이미 물 속에 잠겨 가라앉았다. 
숙희는 몇장이라도 건지려고 몸을 구푸렸다. 그러나 물 속에 가라앉은 종이는 손톱으로 할켜도 올라오려 하지 않았다.  
   “악보는 카피하면 돼요.” 그 남자가 말했다. 굵직한 바리톤의 음성이다.
   “고맙습니다.” 숙희는 인사를 했다.
   “녜. 인사는 나중에 하고, 어서 들어가세요. 난 차를 비켜야 돼요.”
그 남자가 우산 안에서 뛰어나갔다. 
숙희가 같이 받쳐주려고 아, 저기! 했을 때는 이미 그의 추럭이 움직이고 난 후였다. 
추럭이 조심히, 숙희가 보기에는, 그렇게 그녀 앞을 지나갔다. 
물이 많이 고인 주차장은 발목까지 찼다. 가장자리의 물구멍으로 빠지는 물의 양보다 내리붓는 비의 양이 엄청나게 많으니 주차장은 숫제 한강수였다.
   숙희는 물 속을 첨벙거리며 교회 건물로 향했다. 
새삼 주위를 둘러보니 이미 다른 차들은 와 있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온몸이 다 젖었으니 성가 연습을 어떻게 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그 남자가 문 앞에서 문을 열어 잡고 기다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의 고개가 빨리 오라고 끄떡였다. 
숙희는 물을 계속 절벙절벙 밟으며 그에게로 갔다. 
그가 우산을 받아 들고, 그녀는 그가 문을 잡은 팔 밑으로 구부리고 들어갔다. 
안에 일단은 들어왔는데 그녀의 몸에서 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이리오세요, 녜?” 하고, 그가 왼쪽으로 난 복도를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숙희는 얼굴의 물기를 손으로 훔치며, “거기로 가면 어딘데요?” 하고, 물었다. 
어디든 가서 펑 젖은 옷을 어떻게 좀 해야 하는데 남자는 낯이 설고 전혀 감이 안 잡혔다.
   “여전도회 방인데요. 거기서 어떻게 해 봐야죠. 주욱 가다가 왼쪽으로 두번째 방이예요.”
   남자가 말하면서 숙희를 아래위로 훑어봤다. "진짜 많이 젖으셨네."
숙희는 그제서야 자신의 젖은 앞가슴을 내려다 봤다. 구경하거나 만져보는 남자들마다 이구동성으로 감탄하는 데를.
   "한기 들기 전에 얼른 따라 오세요." 그가 말을 하고는 앞서서 가기 시작했다.
숙희는 팔을 늘어뜨려 물을 뚝뚝 흘리며 그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가 코너에서 더 가라는 고갯질을 하고는 되돌아 갔다. 
   ‘뭘 어떻게 하라는 거지?’ 숙희는 좀 더 가다가 돌아보고 그는 이미 사라졌음을 알았다. 
숙희는 처절한 심정으로 어느 방을 찾아갔다. 곧 한기가 들어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숙희는 어쨌거나 왼쪽으로 두번째 방으로 들어갔다...

   숙희는 20년 전의 회상에 젖어 바깥의 물 젖은 풍경을 보며 방 안에 있는 몸이 펑 젖어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남자가 그녀의 펑 젖은 몸을 샅샅히 보는 눈길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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