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어쩌면 아내의 반응을 보려고 외박을 시도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내의 반응이 별로이면 정말 이상한 짓을 할지도 모른다.
영란은 그렇게 생각했다.
남편은 어쩌면 사진의 여자와 전초전으로 만났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일단 길을 터놓고 부부간에 문제를 일으킬지도 모른다. 그런 다음 그의 입에서 나올 마지막 말은 헤어지자는 한마디일 것이다.
신혼 때는 그래도 잘 해주고 다정다감했던 남편인데 그걸 다른 여자에게 빼앗긴다고 생각하니 사진건 보다도 더 미치고 팔짝 뛸 일이다. 게다가 남편이 다른 여자와 키쓰를 하고 입으로 온 몸을 애무하고 셐스를 한다고 상상하니, 아냐 아냐 하고, 영란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운진은 아내가 지켜보는 앞에서 훌렁훌렁 벗고 팬티와 속셔츠를 갈아 입었다.
영란은 슬쩍하고 남편의 벗은 엉덩이를 훔쳐봤다. 그렇게 본다고 뭘 알아지는 건 없다.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현명하다는 소릴 듣나 하고, 영란은 생각을 곰곰히 하느라 남편이 돌돌 말아 내미는 내의를 얼른 안 받았다.
"며칠 동안 씻지도 않은 거야?"
"씻긴 씻..."
"빤쓰야 월-마트 같은 데 가면 얼마든지..." 영랸은 남편의 툭 튀어나온 자지 부근을 봤다.
“나온 김에 좀 있다가 점심이나 같이 먹을까?” 운진은 말하면서 아내의 안색을 살폈다.
영란은 아직도 화가 난 것처럼 대꾸했다. “흥! 아니, 뭐가 이뻐서 밥을 같이 먹어요? 뭘 잘 했다구?”
“그러니까. 내가 밥 살께. 당신 좋아하는 냉면 먹을까?” 하는 운진은 전혀 달라진 기색이 없다. 눈치를 보거나 눈길을 피하는 게 아니라 평상시처럼 덤덤히 말한다.
영란은 눈을 흘겼다. “뭐, 여름이 다 가는데 아직도 냉면을 하나? 치이! 그나저나 미워 죽겠어, 증말! 아니 집 놔두고 왜 이런 가게에서 자요? 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 이제 저 사람들을 어떻게 보냔 말예요! 에구, 남사스러워라. 속으로 얼마나 웃을 거야, 들.”
“태풍 땜에 손님도 별루 없네. 원래는 오늘 바베큐를 하느라 술이 많이 나가는 날인데. 망했네.”
남편이 가게로 나간 뒤 영란은 손에 받아든 팬티와 셔츠를 뒤집어 봤다. 혹시나 해서.
혹시나 여자의 흔적이 팬티에 묻었거나 셔츠에 루즈 자국 같은 것이 스쳤나 해서.
그러나 남편의 팬티는 오줌 몇방울 정도였다. 설령 여자와 동침했더라도 남편은 새 팬티를 사서 싹 갈아입는 그런 스타일이 아니다. 또 남편은 전에 셐스를 하고 나면 그녀가 딲아주지 않는 한 분비와 정액이 묻은 그대로 잠에 곯아떨어지는 성격이다. 그녀가 안다는 남편은 아마 일부러 더 흔적을 남길 것이다.
끝내자는 신호로.
남편이 말도 없이 밖에서 자고 왔다는데, 아내가 전쟁을 못일으키는 이유가 있다면.
그 이유를 남편이 알고 있어서 맞상대로 외박을 했다면.
그래서 영란은 일단 한걸음 물러서서 지켜보는 것이다.
공희가 전화로 정아에게 사 준 것들을 미주알 고주알 언니에게 보고했다.
다음날 화요일이면 학교를 가는데 월요일 이제서야 준비를 시켰다.
내일은 비가 오지 말아야 할텐데 하고 자매는 같은 걱정을 하며 통화를 끝냈다.
베란다 문을 닫고 돌아선 숙희는 점심을 나가서 먹을까 하고 망설이다가 비도 오고 귀찮은데 캔 수프나 하나 까고 식빵이나 토스트 해서 먹자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비가 베란다문 유리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들이치기 시작했다.
‘세상에! 그냥 여지껏 있었으면 젖을 뻔했네? 그나저나 큰 비네...’
그녀가 베란다에서 내려다 보는 주차장에 비가 사정없이 내리친다. 물 커텐이 지나가듯 주차장을 흩뿌리는데 차들이 물에 젖어 반짝반짝거린다.
비가 이렇게 오면 숙희는 운진과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한다.
이번에는 설이를 만난 후라 더욱 또렷이 기억난다.
남녀는 비 때문에 말을 트고.
비 때문에 데이트가 시작되고 비가 올 때 헤어졌던 어느 세상을 지났다.
그런데 그녀는 아주 가끔씩 그런 기억이 한번은 아니라는 착각을 갖곤 했다. 그 착각은 다름 아닌 운진을 전에 다른 어디선가 다른 모습들로 만난 적이 있다는 혼동을 갖곤 한 것이다.
그것은 늘 똑같이 기억나는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좁아터진 공간 안에 갇혀서 비가 때리는 것을 당한다고 기억한 때도 있었다.
때로는 비가 마구 퍼붓는 것을 온 몸으로 받으며 땅을 질질 끌리는 기억도 있었다. 그런데 그런 기억들 중 가장 사랑스러운 것은 온 몸이 비에 젖은 채 그의 앞에 선 때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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