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이 일요일이라 문 닫은 자신의 술가게에 밤 늦게 도착한 운진은 우선 맥주부터 깠다.
그는 가게불은 켜지 않은 채 뒷방만 켜고 병맥주를 수 없이 까고는 사무실 의자들을 연결해 놓고 그리고 그 위에 누워 잠을 청했다. 하루 종일 굶은 뱃속에 들어간 맥주는 금새 취기가 오르게 했다.
‘씨발. 이대로 그냥 탁 죽었으면 좋겠다!’
숙희는 월요일 아침, 즉 노동절날 아침, 일찍부터 울어대는 전화벨 소리에 눈을 떴다.
고개를 돌려서 침대 머릿맡의 시계를 보니 7시다.
전화는 육로 승객 서비스 회사에서였다.
메릴랜드 주의 볼티모어 내쇼널 공항이 태풍으로 일시 폐쇄됐기 때문에 아침 9시 비행기가 안 뜨고 대신 밴 버스로 아직 태풍의 영향을 받지않는 펜실배니아 주의 필라델피아 시로 가서 거기서 낮 12시 비행기를 타겠느냐는 친절한 물음이었다. 아니면 이번 여행은 환불해준다는 친절한 안내도 덧붙였다.
숙희는 핑게 김에 여행을 취소했다. 설이를 만나고 난 후 괜히 심사가 뒤틀어져서 신청한 즉흥적인 여행계획이었기 때문에 별 미련도 없었다. 그리고 사실 신청하고 난 후 후회도 들었었다.
전화 저쪽의 여자는 자기네 탓도 아닌데 몇번이고 불편하게 한 것을 사과하고 환불은 크레딧카드 구좌로 돌아간다는 안내도 잊지 않았다. 태풍이 어디 그 여자의 잘못인가.
지나친 사과는 좀 지나친 것 같다.
‘그래, 그 정도로는 친절해야 다음에 잊지 않고 또 올 거다 이거지...’
잠을 깨게 한 것에는 불쾌했지만 숙희 자신도 서비스 업종의 회사에 근무하기 때문에 저 정도의 서비스 정신은 배워둘만 하다고 기분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녀는 자리에 그냥 누운 채로 침대 맞은 편의 TV를 켰다.
아침 뉴스를 보기 위함이다.
태풍의 눈이 거의 육지에 가까이 왔는데 처음 예정했던 대로의 버지니아 주가 아니고 남쪽으로 꺾어져서 북 캐롤라이나 주 바닷가를 칠 모양이다.
‘거기에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불안할까?’ 하고, 생각하며 숙희는 도로 침대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그 새 갑자기 선선해진 날씨 때문인지 따스한 이불 속에서 나가기가 싫다.
TV를 막 끄려는데 화면에 태풍이 지나갈 바닷가 현장에 나가있는 보도진들이 엄청난 힘으로 밀어붙이는 바람을 무릅쓰고 산더미같이 밀려오는 파도를 보여줬다.
‘세상에, 저렇게들 사는구나! 저러다 다치거나 하면 어쩌려구.’
그것에 비하면 자신의 직업은 참 편한 거라고 생각하며 숙희는 그만 일어나기로 했다.
‘그나저나 이것저것 다 캔슬(cancel) 했으니 뭘 하냐... 참 내, 일이 우습게 됐네?’
그녀는 일단 커피나 한잔하고 동생이 쇼핑은 다 봤는지 알아봐야겠다고 벌떡 일어났다.
같은 월요일 아침에 가게에서 걸려온 남편의 전화를 받고 영란은 새 내의를 챙겨들고 가게로 부지런히 달려갔다. 여자의 사진이 나온 게 계속 맘에 걸렸지만 그래도 남편을 믿고 싶다. 남편은 암만 화가 나도 실수를 하는 사람이 아니다. 이번에는 이유야 어쨌든 어디 가서 바람을 피우고 온 걸로는 여겨지지 않는다. 바람 같은 걸 피울 사람이 아니다.
절대로.
영란은 그거 하나는 확신한다.
영란은 누가 뭐라 하든 남편을 믿는 게 하나 있다. 절대 바람 같은 것을 피울 사람이 아니라는 것.
뭔가 답답한 게 있으니까 바람 쐬러 나갔다 온 걸로 치기로 했다. 그리고 따지는 것은 나중에 하기로 했다.
영란이 가게에 들어서니 운진은 컨비니언 스토어의 커피컵을 들고 있다가 어 하고 손을 들었다.
영란은 일단 화가 난 걸로 하려고 눈을 흘기고 뒷방으로 갔다.
운진이 아내의 뒤를 따라 들어왔다.
영란이 재빨리 훔쳐본 그의 표정은 평온해 보였다. 그렇다면 무슨 이상한 짓을 한 건 아니다. 근 이십년을 산 경험을 토대로 영란은 그렇게 확신했다.
“자, 갈아 입어요! 뭐야, 증말! 사람을 놀래켜도 분수가 있지. 청승맞게 어딜 왜 혼자 갔대?”
영란은 그렇게 선수를 쳤다. "뭐야아!"
운진이 실실 웃으며 영란의 손을 잡았다. "화났소?"
“놔! 꼴두 비기 싫어!” 하고, 영란이 손을 뿌리쳤다.
그가 여전히 실실 웃으며 껴 안으려 했다.
“얼래? 누가 이쁘다구. 갑자기 안 하던 짓을? 수상해, 이이 증말!”
영란은 은근슬쩍 남편의 팔을 쳤다. 둘이 몇년을 모른 척하고 사는 사이지만 그가 딴 데로 샜다가 온 이상 그냥 넘어갈 일은 아니다. '그 사진의 여자랑 바다를 다녀온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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