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영란은 그 사진을 남편의 책상 위에다 그냥 놓았는데 전화벨이 울었다.
혹시나 해서 달려가 받으니 친정아버지였다.
“너 왜 그리 경망하니! 엉? 엄마랑 식구들을 왜 다 불렀어! 너 인제 이 일을 어떻게 감당할 거냐! 엉? 너 오서방이 다릇게 나오면 어쩔래! 남자는 그 나이에 가끔 이상한 짓을 한단 말이다. 오서방 돌아오면 나한테 연락해! 내가 직접 물어볼테니까, 엉? 그리고 행여 뒤지거나 하지 말아라! 알았제? 남잔 뒤에서 조사하거나 뒤지는 걸 알면 곤조를 부린단 말이다!”
영란은 친정아버지가 의외로 남편을 두둔하는 듯 하는 것에 의아했다. 엄마보다 아버지가 더 기가 막혀서 난리를 피울줄 알았는데 이게 무슨 조화일까 싶다.
‘흥! 당신도 예전에 바람을 피운 기록이 있으니 옹호하는 거야, 뭐야!’
하긴 남편을 친정아버지가 제일 좋아해서 결혼까지 밀고 나갈 수 있었다.
영란은 집안을 치우고 난 후 무선 전화기 하나를 들고 목욕실로 갔다. 그리고 행여 남편에게서 전화가 올지 욕조 머릿맡에 전화기를 놓고 거품 목욕을 정성들여 했다.
폭풍전야의 고요라고 비가 그친 줄 알았는데 태풍경보가 내륙지방까지 떨어졌다.
이틀째 내내 쉬면서 동생의 전화를 받은 것이 오늘 하루 종일 한 일이었던 숙희는 밖의 시커먼 하늘에서 불어치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내일 과연 비행기가 뜰까?’ 하고, 걱정이 들었다.
TV 뉴스를 틀어보니 버지니아의 어느 항구 도시가 태풍의 중앙 진로에 들어있다고 도표를 그려가며 설명되었다. 그 여파가 북쪽으로 윗쪽인 메릴랜드까지 미친다고 일기예보하는 남자가 호들갑을 떨었다.
숙희는 그런 식의 뉴스를 보면 가슴이 떨린다. 그래서 그녀는 TV를 끄고 밖을 다시 내다봤다.
그녀는 비 하면 떠오르는 추억이 있다.
그녀가 사정없이 쏟아붇는 비에 젖고 있었고, 어떤 남자가 우산을 씌워주며 도와주었던 일.
그리고 그 남자와 데이트가 시작되었고.
그리고 숙희의 자격지심 내지는 죄책감과 교만함으로 인해 헤어진 남자가 기억난다.
메릴랜드 주에서 남 캐롤라이나 주까지 동부 해안 전체에 소개령이 내렸다. 바닷가 호텔들의 투숙객들은 물론이고 물가에 집을 지어놓고 사는 토박이 주민들도 24시간 안에 내륙으로 더 깊숙이 피신하라는 경찰의 통고가 있었다.
운진은 인터폰으로 그 연락을 받고 가진 짐도 없던 차라 단촐한 차림으로 호텔 라비로 내려갔다.
카운터는 환불을 요구하는 투숙객으로 돗대기시장이었다.
운진은 우연히 눈이 마주 친 종업원한테 십불을 얹어주면서 자신의 방 카드를 맡겼다.
밖은 바람이 보통 센 게 아니었다.
운진은 서 있기 조차 힘들 정도로 밀어치는 바람을 등지고 주차장까지 원치않는 뜀박질을 했다. 그는 호텔에서 도망치는 사람처럼 보였다.
바람은 때릴 때마다 걸음을 빨리 안 떼면 넘어지려 할 정도의 강풍이었다.
차에 타니 들리는 바람소리가 휘이잉 하는 게 보통 강풍이 아닌 모양이었다.
운진은 차 엔진의 시동을 서둘러 걸어 그 호텔을 빠져 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내륙으로 통하는 다리는 불통될 정도로 차들이 메우고 있었다. 모든 사거리마다 신호등이 바뀌든 말든 차들이 꼬리를 물고 엉켜서 쑤시고 못들어가는 차들은 신경질적으로 경적을 울려댔다.
바쁠 게 없는 운진은 옆차들이 새치기를 하든지 말든지 움직이면 움직이는대로 마냥 갔다.
하늘의 시커먼 구름들이 무지하게 빠른 속도로 밀려갔다.
그가 다리에 올라서 보니 오션 씨티로 들어오는 도로는 아예 비었고 오션 씨티에서 나가는 길만 밀렸다.
길가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서 걷는데 심한 바람에 옷들을 감당 못하고 여인네들은 셔츠가 날아 올라가 브래지어가 노출되어도 눈을 못 떴다.
흙먼지가 온지 사방으로 날아다녔다. 종이쓰레기와 다른 것들이 빠른 속도로 달아났다.
길 가장자리의 나무들은 일제히 한방향으로 거의 누웠다 일어났다 하고 있었다. 나뭇가지들이 찻길로 혹은 인도로 마구 날아가 떨어졌다.
상점들의 선전용 깃발들이 맹렬히 팔락거리고, 약하게 매달린 간판들도 흔들렸다.
운진은 차가 개스 페달을 밟을 것도 없이 최저 알피엠으로도 굴러가는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에겐 어차피 서둘러서 돌아갈 집도 아니었다.
그에게 집이란 잠만 나고 나오는 곳이었다.
그는 일주일 중 단 한번 쉬는 일요일에는 하루 종일 잔다.
젊어서 드나들고 성가대니 청년회니 들여다보던 교회도 발 끊은지 아주 오래다.
그는 원치않게 길이 갑자기 똟린 바람에 차의 속력을 올려야 했다.
그는 유부남이 소위 외박을 했는데 걱정이 안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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