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두개의 세상 pt. 02

pt.2 1-3x003

키 작은 사내의 쉼방 2024. 8. 18. 06:53

   운진은 아랫방에서 안방으로 올라왔다.
소위 정 떼려면 무서움이 스며든다고 했다.
그는 그런 불편함이 꿈을 꾸고 나니 가셔진 후에 움직였다.
고인의 물건들을 치워야 하는데 선뜻 손이 가질 않았다.
   처제 영아가 일요일날 형록이와 같이 와서 그녀의 물건과 언니의 것들 중 가질 만한 것들을 챙겨 가겠다 했고, 딸들은 엄마의 물건을 일체 손대기 꺼려했다.
그래서 영란이 입었던 옷가지들은 퍼플 하트라는 자선 단체를 불러서 몽땅 실어가게 했다. 여름옷이건 겨울 코트건 심지어 밍크 코트까지도 아낌없이 내주었다.
영란이 타던 렠서스는 일단 차고 안에 들여놓았다. 나중에 키미가 한다면 그 때 주자 하고.
이제 남은 것은 영란의 소지품들이다.
운진은 경대 설합이나 옷장등을 몽땅 뒤집어 엎다가 무얼 발견했다. 영란의 앨범들과 미처 정리하지 못한 사진들이 들어있는 상자였다.
결혼 생활을 이십년 넘게 했으면서 한번도 뒤져본 적이 없는 아내의 물건들...
   그는 방 바닥에 퍼질르고 앉아 사진들을 죄다 들여다 보다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영란의 고교 시절 때 찍은 사진들은 제법 많은데 대학 시절인가 보다고 짐작할 만한 사진은 하나도 안 나왔다.
끽 해야 어떤 군인과 사복 입고 찍은 사진 정도? 
그리고 그 군인의 얼굴도 자세히 보니 화가선생이다. 그렇다면 열여섯 때 옆집 하숙생에게 순정을 준 것만이 아니라 커서도 계속 사귀었다는 말인가?
그리고 영아의 어렸을 시절 사진이 나왔다.
영아는 어려서부터도 숙성했고 인물이 좋았다. 
그런데 영아도 그 군인과 나란히 서서 찍은 사진이 있다. 처제는 여기서 낳고 자랐다더니, 아냐?
   '즉흥적인 옆집 대학생과의 풋사랑이 아니었는 모양이군...'

   운진은 형록과 함께 위로하러 온 영아에게 꿈 얘기를 했다.
   "어머어! 이상하죠? 저도 언니 꿈을 꾸었는데, 꿈에서 표정이 밝았어요."
   "두 분이 서로 화답한 거지, 뭐."
   형록이 오히려 눈 주위를 눌렀다. "누님 이제서 좋은 데 가셨겠네."
형부 운진이 내놓는 사진을 받아서 보던 중, 영아가 그 군인과 같이 찍은 사진을 보고는 얼른 치우는 것이었다. "어머! 이런 게 왜 아직도!"
   "그거 챌리 친아버지 아냐?" 
   운진은 시침떼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챌리랑 많이 닮았던데."
   "아녜요! 이게 왜 아직..."
   "뭔데, 보자."
형록이 영아에게서 그 사진을 빼앗으려 했고, 영아가 물리다가 사진이 쭉 찢어졌다.
영아가 형록의 손에 남은 반쪽을 나꿔챘다.
   "왜 그래, 영아씨?"
   "아니. 아무 것도 아냐!"
그리고 영아는 사진 몇점을 더 챙겨갔다.
   운진은 그 군인의 다른 사진을 치워 놓은 것을 밝히지 않았다.
그 군인이 영란과 영아 자매와 어깨동무하고 환하게 웃는 사진을...
운진은 영호에게 보여주며 다 지난 일 알고나 넘어가자고 물었다. 
   "다 지난 일이라고 하시니 말하지요?" 
영호가 들려준 이야기는 운진으로 하여금 새삼 구토가 나오게 했다. 
영란은 그 화가선생과 열아홉 때부터 동거 생활하던 남자라고. "화가는 화간데... 전시회 같은 데는 한번도 못 나가본 사이비 화가! 그 자식을 혼인신고만 하고 여기로 불러 들여왔는데, 맨날 술 처먹고 때렸수. 여기서 새 여자가 생겼대나."
그래서 두 사람이 헤어졌는데 그 사이비 화가가 결혼을 했다는 소문을 듣고 영란이 찾아가서 두 여자가 한집에서 싸우며... 
   "그 때는 몰랐다가 나중에 집에 와서야 누이가 임신인 걸 알았수. 그리고 매형이랑 벼락치기로 결혼한 거지..."
   "그럼, 성악했다는 건?"
   "그거야... 아버지가 맨날 지어낸 이야기... 어려서 동거생활 했는데 성악은 무슨..."
영호는 옛매형에게 누나는 한국에 스무살 한참 넘은 딸이 있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누나가 툭 하면 한국에 다니러 나갔었는데 이 냥반은 의심도 안 했나...
   이제 누이가 끝끝내 입 다물고 죽었으니 식구들이 밝히지 않는 한 그 딸은 잊혀져야 한다.

'[소설] 두개의 세상 pt. 02' 카테고리의 다른 글

pt.2 1-6x006  (1) 2024.08.18
pt.2 1-5x005  (0) 2024.08.18
pt.2 1-4x004  (0) 2024.08.18
pt.2 1-2x002  (0) 2024.08.18
pt.2 1-1x001 앞서 간 이의 명복을 위하여  (0) 2024.0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