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두개의 세상 pt. 02

pt.2 1-4x004

키 작은 사내의 쉼방 2024. 8. 18. 06:54

   운진은 영란의 나머지 다른 소지품들은 열어보지도 않고 상자에 도로 담아 테잎으로 봉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차라리 고인이 된 아내에게도 예의일 것 같아서였다. 
치운답시고 이것저것 뒤지다가 더 흉한 과거가 나올까 봐...
그리고 모르고 살았던 다른 사실들이 밝혀질까 봐 두려웠다.
이혼을 했고, 아니, 사별까지 했는데 옛일을 더 알아서 뭐 하겠다고.
   그는 아내 영란이 죽기 얼마 전 동생 영아에게 '부끄러우니' 화장해서 뼛가루를 먼 바다에 뿌려달라 했다는 그 심정을 이해하기로 했다. 그러자니 그는 새삼 눈물이 나왔다. '불쌍한 사람. 그런 것들을 숨기고 살면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차라리 고백하고 깨지든 계속 살든 했으면 덜 괴로웠을 것을...'

   버지니아 주를 동서로 관동하는 84번 고속도로가 있다.
영호 왈 사이비 화가 양반이 그 도로에서 교통 사고로 절명했다고.
   "누이가 데려갔나..." 
   영호가 괜히 운진의 눈치를 봤다. "흥! 그런 생각이 드... 네?"
운진은 코웃음을 쳤다가 곧 후회했다. "애들은 없대냐?"
   "알게 뭐유! 있으면, 우리하고 무슨 상관 있는데?"
영호가 뒤늦게 사람 됐나 제법 올바른 화를 냈다.
   "근데, 언제 죽었대냐?"
   운진은 그렇게 물으며 영호의 눈을 봤다. "자넨 어떻게 알았고?"
   "나? 어..." 영호가 마치 도망칠 기색이었다.
   "참! 그 자 이름이 뭐냐?"
   "이름은 왜?"
   "난 여태 그 자식 이름도 모른다? 아, 챌리는 지 친아버지 이름을 알겠지?"
   "글쎄? 난 잘..."
운진은 영호의 코 앞에 손을 내밀었다. "키 내놔라."
   "뭘?"
   "이 집 열쇠 갖고 있는 거."
   "열쇠를 달라구?"
   "응."
   "난... 이제 여기 못 오게?"
   "자넨 자네네 집으로 가야지. 여긴 이제 나랑 애들만 살 거거든."
   "아니, 나두 조카들 보러 와야지."
   "우리 있을 때 미리 전화하고, 오라 하면 와라. 키 내놔."
   "지금... 안 갖구 있는데."
   "알았다."
운진은 영호에게 얼른 꺼지라는 손짓을 했다.
   '헛약은 새끼! 랔(lock)을 바꿔 버리면 끝나는 걸 잔머리는!'
영호가 나가면서 씨팔 어쩌고 하고 투덜댔다.

   운진은 나날이 허전함을 느꼈다. 
아내와 이혼만 했을 때는 그래도 어딘가에 살아있었다는 느낌이 의지가 되었는데, 이제 아주 완전히 사라지고 나니 남는 것은 무(無)였다. 
아이들도 정작 엄마가 죽고 나니 기운 없어 하고 말수들이 줄어들었다. 
   운진은 초상 때문에 며칠 동안 닫았던 가게를 다시 열었다.
이제는 위로의 말들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산다는 게... 세상에 살아 남아 있다는 게 허무하게 느껴진다.
   '못난 사람. 그렇게 갈 것을...'
그 새 운진의 머리가 허옇게 샜다.
누가 보면 얼른 못 알아볼 정도로 수척해졌고, 그나마 없던 말수가 아예... 벙어리가 되어갔다.
그는 그렇게 입을 닫았다.
그는 간 이에게 약속한 대로 조가한테서 빼앗은 가게를 새로 단장해서 열고, 형록과 영아에게 주었다. 
   "이것 갖고 두 사람, 아예 여기서 죽어."
형부 운진의 그 말에 처제 영아는 손에 받은 열쇠를 꼭 쥐었다. "네."

'[소설] 두개의 세상 pt. 02' 카테고리의 다른 글

pt.2 1-6x006  (1) 2024.08.18
pt.2 1-5x005  (0) 2024.08.18
pt.2 1-3x003  (0) 2024.08.18
pt.2 1-2x002  (0) 2024.08.18
pt.2 1-1x001 앞서 간 이의 명복을 위하여  (0) 2024.0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