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두개의 세상 pt.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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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작은 사내의 쉼방 2024. 8. 19. 00:47

   운진은 사나흘을 고민한 후 설이에게 숙희의 연락처를 물었다. 
설이가 '그 분이 가르쳐주지 말랬다' 며, 망설이다가 숙희의 전화번호를 주었다. 
운진은 숙희의 전화번호를 받아 적으며 새삼스럽게 손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 쪽지를 주머니 안에서 하루 종일 만지작거리다가 결국 일반 근무자들의 퇴근 시간을 넘겼다. 
   그는 가게를 끝내고 집으로 가는 길에 차 안에서 셀폰으로 숙희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혹시나 음성 메세지를 남길 수 있으면 인사치레나 하리라. 
그러면 다음날이나 언제고 듣겠지 하고 신호음이 들리는 셀폰을 귀에다 댔다.
   숙희는 사무실 창 밖의 야경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얼마 안 있으면 그 동안 정든 이 방은 물론 낮이나 밤이나 내다보며 눈의 피로를 풀곤 하던 이 도시의 풍경과 작별한다.
그녀의 책상에 놓인 구내 전화기가 삐리리 하고 울었다.
   '응? 이 시간에 누구? 공흰가?'
그녀는 조그만 스크린에 나타난 번호를 보려고 미간을 좁혔다. '시력이 점점...'
그녀는 모르는 번호네 하며 수화기를 조심히 집어 들었다. 
   “This is Sue. How may I assisst you? (쑤 입니다. 어떻게 도와 드릴까요?)”
운진은 셀폰을 귀에서 떼었다. 
   ‘어? 이 시간에 일 하나? 아니면 설이가 집 전화 번호를?’
   “Hello?” 숙희가 한번 더 말했다.
운진은 저도 모르게 헛기침을 크게 하고 셀폰을 다시 갖다댔다. 
   “예, 저어, 아, 오, 오래, 오랫만인데요, 아, 안녕하십니까, 오운진입니다!” 
운진은 혀가 갑자기 굳어왔다. ‘난 왜 늘 이 여자만 대하면 주눅이 드나!’
   “운진씨?” 숙희의 어조는 평범했다.
   “녜! 아, 안녕하십니까!” 
운진은 또 큰기침을 했다.
숙희는 수화기를 잠시 떼었다가 귀에다 대었다. 
   ‘이 이는 전화하는 에치켓이 늘!’
숙희는 일부러 사무적으로 말하고 싶었다. “오랫만이네요? 웬일이시죠?” 
운진은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말했다. “오랫만, 예, 저기, 제가 잘못 알고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숙희씨께서 변호사를.”
   “변호사요?” 
숙희는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이 사람들이 말하지 말라니까 기여코 말했네.'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을 했지만, 아, 아무래도 숙희씨, 근데, 맞죠?”
   “네, 맞아요. 설이에게 전해듣고 내가 잘 아는 변호사를 보내드렸어요.”
   “그, 글쎄, 그럴 것 같더라구요. 어, 어쨋든 덕분에 잘 풀렸읍니다. 그래서 보답을 어떻게 드리나 고민하다가 일단 전화는 드려야 도, 도리일 것 같아 망설이다가, 망설였죠. 사실은 직접 통화할 자신이 없어서 숙희씨 퇴근하셨으면 메세지나 남기려 했는데 늦게까지 일하시나 보죠?” 
운진의 말이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네. 사실은 이번 주가 여기 마지막 근무예요.”
   "아, 예. 설이에게 얘기 들었습니다. 전근 가신다고..."
   "네, 그래요."
   "그럼, 시간이 없으시겠네요."
숙희는 운진의 '시간이 없겠다' 는 말에 어, 이 이가 대놓고 날 보자하나 하고, 놀랐다. 
   '뭐야. 변호사 관계로 아예 만나자? 부인 죽었다 이거지.'
그런데 운진에게서는 다른 말이 나왔다. “그나저나 저기, 보답을 어떻게 드려야 하죠? 변호사비를 제가 갚아야죠. 보, 보니까 꽤 굉, 굉장히, 쟁쟁한 변호사라 많이 달라할텐데... 요?”
   “꼭 갚고 싶으세요?”
   “네! 기회를 주십시요.”
   “운진씨 말마따나 꽤 비싼데요?”
   “그래도 갚아야죠. 숙희씨 수중에서 나간 돈인데요...”
   “어쨌든 연락이 오는군요. 난 전혀 모르고 지낼 줄 알았는데?” 
   숙희는 20년 만에 들어보는 운진의 음성이 많이 늙었다고 느끼며 의자 등에 기댔다. "전 처음에 사고 소식을 전해 듣고 안 믿었어요. 운진씨가 남을, 그것도 돌로 때렸다는 것에 놀란 건 사실이구요."
   "그,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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