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작에 연락드렸어야 하는 건데, 제가 좀 칠칠맞다 보니 늦었습니다. 용서하십시요.”
운진의 그 말에 숙희는 하마터면 꺄아 하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경우야 다르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용서해 달란 말이 그녀로서는 아닌 말로 평생 기다린 말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시침뗐다. “뭐, 모르셨다 해도 전 내색하지 않을 작정이었어요.”
“어, 그러면 안 되죠! 그러면 제가 평생 나쁜 놈이 되죠!”
“어차피 저한테 잘 하신 건 없잖아요?”
"..."
숙희는 상대방이 잠자코 있는 것을 말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운진이 한참 후에 말을 떼었다. “여전하시네요...”
“뭐가요?”
숙희는 웃으려다 말았다. "뭐가 여전하죠?"
“남의 감정을 후벼파는 거 말입니다!” 운진의 말투가 약간 토라진 듯이 들렸다.
“사실 아녜요? 운진씨가 저한테 어떻게 하셨죠?”
“흠... 그래요? 얼맙니까? 설이편에 보내드리죠.”
“그러세요. 저도 설이편에 얼마라고 말할께요.”
"알았습니다!"
꾸룩 하고, 그 쪽에서 먼저 전화가 끊겼다.
숙희는 그 소리를 참 싫어한다. "아니, 저!"
그녀는 스크린에서 사라진 전화번호를 기억해 내려 하다가 들고 있던 수화기를 살며시 내려놨다.
‘이 이는 아직도 애들처럼 삐치는 건 여전하네?’
그녀는 큼지막한 전화기판에서 무얼 하나를 눌렀다. 명함 만한 스크린에 번호가 떴다. 사일공에...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 번호를 메모지에 옮겼다.
그녀는 간추린 사물함을 들고 새삼 방안을 둘러봤다.
이 날로 여태까지 근무한 이 방은 끝이고 좀 쉬다가 서부로 근무지가 바뀐다.
이미 그 쪽에다 독신자 칸도도 경치 좋은 곳으로 계약해 놨고, 여기의 칸도는 누구에게 위임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위임 준 이와 만나야 한다.
그녀가 그 인물과 만난다는 말은 그녀로서는 셐스 제공이다. 흔히 그녀가 누구에게 어떤 부탁을 할 때 상대들은 의례히 그녀의 몸을 원하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그녀의 기막힌 몸매를 갖고자 어떠한 부탁이건 들어주려고 덤벼든다.
그녀는 그런 다음 남은 며칠을 동생 공희네 식구와 미운 모친이랑 지내고 담 달 초순에 떠날 예정이다.
‘댁의 조카 설이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짤렸네요. 만날 일이 아마 없을 겁니다.’
숙희는 빈 방의 전등 스위치를 내렸다.
운진은 기분이 되게 나빠졌다.
‘이 여자는 하여튼! 에잇!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애. 그러니까 평생 독신이지! 이런 여자를 어떤 놈이 좋아하겠어? 흠, 인젠 돈도 좀 있다 이거지! 쳇!’
그런데 한가지 이상한 것은 근 20년 만에 숙희와 전화 통화를 했는데, 마치 어제의 안건을 오늘에 연결해서 대화하는 것처럼 낯설지가 않았다...
그 점은 숙희도 마찬가지였다. 그와 마지막 대화를 나눈 것이 그 옛날 오션 씨티 호텔 방에서 헤어지며 누구든 먼저 결혼 승락받는 사람이 찾아와서 기다리자는 약속을 했을 때였는데...
방금 그와 나눈 몇분 간의 통화가 마치 왔어야 했고 그리고 약속대로 온 것처럼 어색하지 않았다.
'내가 다시 전화 해?'
숙희는 복도 엘레베이터 앞에서 서성거렸다. 그녀는 방금 나온 제 방을 돌아다 봤다. '전화 해, 말어?'
왜 나는 생각과 달리 항상 전혀 엉뚱한 말이 나갈까...
내가 간간히 사귀었던 남자들도 나의 이런 점을 참 싫어하곤 했는데...
그 중 그녀를 처음 성폭행한 랠프는 분노하곤 했다.
왜 너는 천의 얼굴을 가진 년처럼 구느냐고. 즉 어느 때는 셐스를 할 줄 모르는 빗치처럼 굴다가도 생각나면 완전 셐스광처럼 구는 이중성을 보이느냐고.
그 다음으로는 제프인데 그는 둘이 셐스를 가진 그 다음날 그녀가 전혀 낯선 관계처럼 대하는 것에 대해 불만과 분노를 발하곤 했다. 회사내에 비공식이나마 둘이 불륜사이인 것을 다 아는데 새삼스럽게 속 들여다 보이는 행동을 왜 하느냐고.
게다가 경비메네저이면서 그녀의 성 서비스 출장에 발이 되어온 빌리도 그랬다. 때로는 매를 맞아가면서도 셐스를 거부하는가 하면 약 들어간 날은 밤새 애들더러 하자고 들볶느냐고.
'[소설] 두개의 세상 pt. 02' 카테고리의 다른 글
pt.2 2-6x016 (0) | 2024.08.19 |
---|---|
pt.2 2-5x015 (0) | 2024.08.19 |
pt.2 2-3x013 (0) | 2024.08.19 |
pt.2 2-2x012 (0) | 2024.08.19 |
pt.2 2-1x011 20년 만에 얽힌 통화 (0) | 2024.08.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