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두개의 세상 pt.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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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작은 사내의 쉼방 2024. 8. 19. 00:49

   설이가 쟁반에 담아온 찻잔을 삼촌 침대 머리맡에 놓았다. 
운진은 향을 이미 맡았으면서도 조카를 봤다. "그건 뭐냐?"
   “생강차예요.”
   “오, 그래. 고맙다.”
   “요즘 감기가 무섭대요. 식기 전에 드세요.”
   “그래, 고맙다.”
설이가 찻잔을 내려놓고 바로 나가지 않고 우물우물거렸다.
   “뭐, 할 말 있니?”
   “네, 저기요. 아무래도 제가 취직을 해야 할까 봐요. 집에...”
   “내가 아파트 세는 대준댔는데, 왜 엄마가 또 일을 그만두었니?”
   “아뇨, 그건 아닌데요.”     
   “지금 여기 있는 게 싫어서?”
   “아뇨, 그건 아니구...”
   “용돈이 더 필요하니?”
   “아뇨, 그런 게 아니라...”
   “괜찮아. 얘기 해봐.”
   “그 아줌마가요, 먼저 캘리포니아로 오면 일을 시켜준다 했을 때, 그 땐 싫다 했는데.”
   “연락했냐, 이미?”
   “이-메일이 왔어요.”
   “잡(job) 있다구?” 
운진은 괜히 기분이 나빠졌다. 충분히 일할 나이의 설이를 데려다 가두워 놓은 것도 피치 못할 일이지만 구태여 이-메일을 보내며까지 아이를 오라가라 하는 것은 좀 지나치지 않나 해서 불쾌했다. 
운진은 생강차를 후후 불어 마시며 생각했다. “너 여기 있다는 거, 그 여자가 알어?”
   “네.”
   “알았다. 내일 얘기하자.”
   “네.” 설이가 빈 쟁반을 가지고 물러갔다.
운진은 잠자리에 누워 천장을 물끄러미 올려다 봤다. 
사방 커튼에 가려져 천장은 손바닥만하게 보여졌다. 
머리맡 스탠드의 불빛이 침대 가장자리의 커텐을 천정에 수 놓았다. 
   ‘보내야지... 내 욕심만 차리자고 일 할 능력이 있는 아이를 붙들어 놓을 수는 없지.’

   며칠 후 영란의 나머지 옷가지들을 몽땅 묶어서 불우 이웃돕기 자원 봉사 센터로 넘기고, 설이가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영란의 친정엄마가 왔다. 
외할머니란 이가 온 다음 날로 아이들하고 아침부터 대판 붙었다. 
아이들은 아침에 주로 우유나 반잔 마실까 거의 아무 것도 못 먹고 학교를 가게 마련인데, 부득부득 먹여서 보내겠다고 붙잡아 킴벌리는 먹지도 못한 채 학교만 늦고 챌리도 늦었다.
운진은 장모란 이와 눈도 안 마주치고 집을 나섰다. 
   이혼한 딸이면 장모도 끝나는 거 아닌가? 아니, 죽었으니 아예 남 아닌가? 
운진은 머리를 흔들었다. 내가 화를 불러들였나?
점심 때쯤 킴벌리한테서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아빠란 이는 딸의 분노를 읽었다. 
킴벌리가 할머니 욕을 마구 해 댔다. “Send her home! Or I’m not coming home! (그녀를 집에 보내! 아니면 나 집에 안 들어가!)”   
   오후에 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 
챌리는 할머니가 계속 있을 것인지만 물었다. 
큰애는 그래도 속이 차서 킴벌리처럼 마구 퍼붓지는 않았지만 같은 뜻의 내용이었다.
애들이 외할머니와 불편해 한다고 해서 일단 와 있어 달라 해놓고는 금새 가라고 하기도 그렇고... 
장모를 부른 것이 큰 실수였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다고 큰애 보고 살림을 다시 맡아보라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침에 눈 뜨면 가게에 나가고 밤 아홉시 열시까지 문을 여는데 도중에 집에 와 볼 수도 없고... 
운진은 괜시리 화가 났다. 그 화의 대상은 딱히 없었다. 아니.
그는 영아에게 화가 났다. 아니.
그는 영아를 빼앗아 간 형록에게 화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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