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단어는 내 사전에 없는 말
숙희네 학교는 정문 입구부터 썰렁했다.
강의실은 보통 반도 안 찼고, 교련 없어진 운동장은 낙엽만 굴러 다녔다.
숙희는 돌계단에 수건 깔고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뒤에서 그늘을 타고 불어오는 가을바람이 그녀의 목덜미를 하얗게 쓰다듬으며 지나갔다.
숙희야
바람이 그렇게 소리냈다.
숙희야
낙엽이 그렇게 소리냈다.
숙희는 고개를 들어 빈 운동장을 보다가 문득 뒤를 돌아다 봤다.
정애가 거기 서 있었다.
숙희는 다시 책으로 눈을 돌렸다.
"윤 선배가 다쳤어."
정애의 그 말에 숙희는 조금 뜨끔했다.
그러나 숙희는 내색함을 애써 감춰야 할 정도의 상처는 아니었다. "근데?"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그런데에!" 숙희는 짜증이 확 났다.
그리고 그녀의 뒤는 조용해졌다.
숙희는 뒤를 돌아다 보고 정애가 가버렸음을 알았다.
나는 남자에 대해 생각 조차 안 하기로 결심한 여자야! 왜?
바로 너 때문에!
친구라는 가면으로, 가로채는 나쁜...
숙희는 책의 보던 페이지를 접어서 가방에 넣었다. 그런다고 쫓아가는, 남자도 나쁜...
일주일 후 학교는 정상으로 돌아갔다.
데모에 참여했던 학생들은 일종의 반성문을 의무적으로 두 장씩 제출하고 방과 후 두 번 밀린 교련을 한꺼번에 받기로 일단락되었다고. 그러나 그 반성문은 졸업 심사 때 반드시 반영될 것이었다.
교련 보충수업은 기합으로 시작해서 기합으로 끝났다.
"일본애들은 데모를, 아니, 그러니까 항의를 더 무섭게 한단다."
"왜? 어떻게, 엄마?"
"개네들은 유서부터 써놓고 의견이 관철 안 되면... 할복 자살을 해."
"잌!"
"그것도 그냥 푹 찌르는 게 아니라, 제 배를 한쪽에서부터 꽂고 반대쪽까지 긋는단다."
"잌!"
"보통 독한 놈들이 아니지."
"엄마는 그런 데서 어떻게 공부했어?"
"학생들끼리도 꼭 존댓말 쓰고 예의 지키고 그러지. 조센징이라고 놀려도 공부를 뛰어나게 잘 하면 다들 부러워하고 친구 하자 모이지."
"흥! 공부 못 하면?"
"아니면, 아예 세게 놀던가. 그러면, 붙여주지."
숙희는 공부 잘 하고 예의 지키는 모범생으로의 친구는 만들기 싫고 차라리 거세게 노는 걸로 한몫 할까 하고 생각하면서 속으로 웃었다.
참! 그 눈썹은... 서울이랬는데, 어디서 뭐 하나.
벌써 일년 넘었으면 길 거리에서라도 스치지 않았나.
어디 학교냐.
숙희는 그러나 어려서 느닷없이 나타난 한 중령이란 이 때문에 겁 먹고 주눅 든 성격을 쉽사리 고치거나 버리지는 못하고 속으로만 이 생각 저 생각하며 혼자 노는 습관은 여전하다.
그 냥반 잊을 만하면 오곤 했는데.
숙희는 최근 들어 찝차가 학교 앞에 안 와 있는 것이 되려 이상했다. 군대도 데모 때문에 바쁘나.
그나저나 윤 선배는 어쩌다가 다친 거야. 정애 기집애만 아니면 문병이라도 가겠건만.
숙희는 누구 때문에 누굴 잃은 건지 분별이 안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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