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과 실체
숙희는 아까부터 반쯤 열려진 현관문 그 밖을 연신 돌아다 본다.
그녀의 얼굴에 그녀답지 않게 수줍은 미소가 한가득하다. 그녀의 손은 드라이어에서 꺼낸 빨래를 개키느라 바쁘다. 남자용 삼각 팬티를 하나 집어서는 모양이 잘 잡히도록 죽죽 편다.
차 소리가 들린듯 해서 그녀는 앉아있는 소파에서 얼른 일어선다. 밤색 긴 치마 위에 엷은 베이지색 스웨터를 입은 그녀의 자태가 참 곱다.
차 문 닫히는 소리가 경쾌하다.
숙희는 손에 쥐었던 삼각 팬티를 소파에 던지듯 놓고 현관문을 향한다.
밖에서부터 남자가 휘파람을 신나게 블며 가까이 다가온다.
숙희는 현관문을 마저 열고 밖으로 얼굴을 내민다. "자기!"
"어이!" 운진이 손을 번쩍 들고 다가온다.
"오늘 많이 팔았어?"
"그럼! 내가 누구야!"
운진이 문 앞 댓돌에 깡총 올라서자마자 숙희를 끌어 안는다. "우리 숙희 마누라님은 오늘 하루 종일 뭘 하셨나?"
숙희가 운진에게 살짝 입맞춤을 해준다. "자기 생각했다."
"아하하하!"
운진의 손이 그러고 보니 조금 불러져 있는 숙희의 배를 어루만진다. "으음! 아무리 봐도 아기 밴 여인은 신의 최고 걸작이라니까!"
숙희가 운진의 손을 살짝 잡는다. "옆집에서 본다아."
운진이 다른 손을 내밀었다. "쨘!"
그의 손에서 묵직해 보이는 비닐백이 흔들린다.
"이거 뭐야?"
"우리 숙희님 좋아하시는 오물렛?"
"어디꺼?"
"그 집꺼?"
숙희가 운진의 손에서 비닐백을 얼른 빼앗듯 받는다.
"나 씻는 동안 다 먹으면 안 됨?"
"알았어. 어서 씻기나 해." 숙희가 곱게 눈을 흘긴다.
운진이 숙희를 얼싸안고 흔들면서 집 안으로 들어선다.
방 두칸짜리 타운홈 안은 비록 가구가 단촐하고 비좁아 보이지만 아낙네의 손길이 구석구석 닿은 것이 눈에 확 들어온다. 리빙룸 전면에 숙희와 운진의 결혼 사진이 걸려있다. 두 사람의 젊은 모습을 담은.
숙희가 그 사진 앞을 지나서 부엌으로 간다.
그녀가 부엌 식탁 위에 그 비닐백을 조심히 놓는다.
"방금 만들어 왔나 봐, 자기?" 숙희가 냄새를 맡느라 숨을 들이 마신다.
"어, 그럼. 우리 숙희님 잡수실 거라고 내가 그랬더니 특별히 더... 잘...마...ㄴ"
운진의 말소리가 마치 스피커 볼륨을 갑자기 줄이는 양 사라졌다.
숙희는 발치로 몰려드는 찬기운에 눈을 떴다.
독방에 갇혀서 벌써 며칠 째인지 모르게 벽에 기대고 앉은 자세이다.
철커덩!
철문에 뜷린 구멍으로 찬바람이 계속 들어오며 손 하나가 플래스틱 쟁반을 들이밀었다.
멀건 수프 같은 것과 밤색에 가까운 옥수수빵이 전부였다.
숙희는 그 방향을 쳐다보다가 머리를 벽에 기대며 눈을 감았다.
[빗치 머스트 비 앀(년이 돌았음에 틀림없나 봐!)!] 여자의 남자 같은 음성이 아주 멀리서 들려왔고, 그 구멍이 스르릉 하고 내리닫혔다.
숙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한숨인지 울음인지 이상한 신음을 내었다.
잠시 후, 그녀의 어깨가 마구 들먹이며, 그녀의 손 사이로 오열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운진씨! 나 어떡해...'
그녀는 남편이 옳았다 안 옳았다 따지기 전에 개리의 말을 안 들은 것이 이제 와서 후회된다. 그녀가 암만 범죄자라 해도 남편이 있는 여자라면, 특히 마지막 울타리로 택한 남편을 내세웠더라면 구속기소까지는 안 갔을 텐데.
그녀가 그를 남편이라고 지칭하면서 몰무식한 이로 취급하니 개리의 분노를 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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