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진은 숙희가 그 돈에서 알아서 쓴다고, 그가 바랐던 대로 정애에게 동창을 도와주는 명목으로 조금 줄 줄 알았는데.
숙희가 정애를 만나서는 돈을, 그것도 그 수표를 그대로 몽땅 주었다.
동창의 애들 학자금 지원쪼로.
통 큰 여자답게.
숙희에게는 그녀 나름대로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돈의 위력은 돈에 쪼달려 본 사람이 더 잘 안다.
그런데 김정애란 여인이 다른 시기심이 발동했다.
보아하니 동창 숙희에게서 보통 돈 있다는 냄새가 나는 것이 아니었다. 아마 모르긴 해도 밀리언에어는 충분히 될 만한 냄새가 풍겼다.
운진이란 남자는 그저 좀 있는 줄로만 알았는데, 숙희를 보니 그랬다. 흥!
'그냥 넘어갈 내가 아니지! 너 한국에서 내 신세를 얼마나 졌는데, 겨우 애들 학자금 정도 주고 나보고 얼씬도 말라고?'
'이걸로 내 입을 막겠다아? 어림도 없지!'
'우연이지만 숙희 너 자알 걸렸다!'
그래서 김정애가 운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애들 문제로 의논하고 싶으니 시간 좀 내어 달라고.
"숙희 몰래 나오세요. 아셨죠?"
운진은 어이가 없지만 무조건 무시하는 것은 실례라고 여겼다. "무슨 이유입니까?"
"걍... 오랫만에 만나니, 반가웠구우, 뭐..."
"제가, 뭐, 실수라던가 잘못한 거 있습니까?"
운진은 겉으로는 그렇게 점잖은 뺐지만 속으로는 다른 마음이 동했다. "집사람 몰래 나오라는 건, 고전에 많이 나오는 대목 같소. 왜요, 회포라도 풀자는 겁니까?"
"아이, 이제 오 선생님처럼 말하시네."
"애들 문제는... 애들 아버지하고 의논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애 아빠가 여기 실정을 모르잖아요. 암만 설명해 봐야... 서울 안 가 본 놈이 서울서 사는 놈 이긴다고, 제 잘났다고 쏴부치고 나면 탁 끊어요."
"흐, 음!"
운진은 저도 모르게 긴장된 한숨이 나왔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나갈 수가 없겠는데. 혹 우리 집사람 만났잖소?"
"만났지만... 숙희하고는 애들 문제에 대해서 의논이 안 되죠. 걘 애가 없는 것 같던데."
"꼭, 뭐, 애 문제는 애 낳고 키우는 사람만 안답디까? 그 사람은 사회 경험도 많고, 또 현재 직접 낳은 딸들은 아니지만, 우리 애들과도 무난히 지내는 걸로만 보아도..."
"오어? 날 꼭 좀 만나셔야겠네? 내, 정말... 우리 만나서 얘기할래요?"
"그... 우리가 전에 잠시 만났던 사이라는 말을... 꼭 했어야 했소?"
운진은 윗층에서의 인기척 소리에 놀라서 셀폰을 얼른 껐다.
숙희가 약간 상기된 얼굴을 하고 왔다.
"자기 누구랑 통화하고 있었어?"
"아무 것도 아냐."
"으응. 난 또 자기가 누구랑 통화하는 줄 알고."
운진은 고개를 저어 보임으로써 한번 더 부정했다.
"나, 자기가 준 그 수표, 정애한테 다 준 거, 자기 화 안 내지?"
"뭐, 당신이 줄 만 해서 줬으면 된 거지, 뭐."
"불쌍하잖아. 미국에 와서 애들 공부시킨다고 고생하는데..."
"그러니까."
"자기가 생각지 않게 준 돈이라 부담없이 썼어."
"잘했다잖소."
"대신, 내가 뭘 해 줘?"
"키쓰나 하지?"
"호호! 그래?"
숙희가 남편의 두 볼을 두 손으로 잡고 입술을 가져다댔다. "고마워."
운진은 머뭇거리다가 일단 지금은 아내를 믿자 하고 과감한 키쓰를 구사했다.
숙희는 일순 당황하다가 일단 지금은 남편을 믿자 하고 혀 놀리는 키쓰를 구사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김정애 한 사람을 놓고 궁리가 분분했다.
숙희는 정애를 물리쳐야 하고 운진은 정애를 입 틀어막음으로 한번 더 갖는 상상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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