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다가 정애가 땡쓰기빙 때 음식 두어가지 장만해서 찾아가도 되겠느냐고, 간절히 원했다.
'애들도 짧은 브레이크라 엄마한테 온다 하고 해서 겸사겸사... 장소도 마땅치 않고...' 등등의 이유로 애원하듯 하는데 숙희가 딱히 거절을 못했다.
사실 동창이라 하지만 남편과 관계가 있었고, 아닌 말로 조금만 한눈 팔면 기회와 장소가 활짝 열린 미국 사회인데, 게다가 한창 성적으로 활달한 사십대 후반 나이의 여인을 다시 놀러오도록 한다면...
숙희는 지금 성교를 거의 금지해야 하는 임신 말기에 다가가는데.
그런데 운진이 마침 나섰다. "아, 이번 땡쓰기빙에 영국에서 우리 작은딸 내외와 여기 사는 우리 큰딸 내외가 온대거든요. 장소도 그리 넓지 않고... 또 신랑들이 외국인이라... 네."
정애가 이해를 잘 못하겠다는 기색이었지만 하는 수 없이 수긍했다.
그래서 숙희와 운진은 어쨌거나 그 음식점에서 식사를 마치고 나왔다.
"미안하네... 쟤도 외로우니까 나한테 의지되어서 그랬나 본데."
숙희가 눈시울을 붉혔다. "내가 좀 지나치게 민감했나?"
운진은 암말않고 집까지 가도록 운전만 했다.
숙희가 하루 종일 밖에 나다녔더니 다리도 아프고 피곤하다며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면서 그녀가 친절히 이런 말을 남겼다. "자기, 만일 하고 싶으면, 난 괜찮으니까 나 잠들었어도 자기 맘대로 해두 돼."
"!!!"
운진은 순간적으로 모욕감을 느꼈다. '흥! 행여 내가 다른 생각할까 봐...'
운진은 지하실에 있다가 술잔을 가지고 리빙룸으로 올라왔다.
그는 얼음만 넣은 위스키 잔을 티테이블에 내려놓고 텔레비젼을 켰다.
요즘은 뉴스만 나오면 이라크에서의 전쟁 보도 뿐이다.
운진은 위스키를 이것만 하고 자야지 하며 반쯤 비웠다.
그럴 때 테이블에 아무렇게나 놓은 그의 셀폰이 진동했다.
'나한테 전화할 사람이 누구지?'
운진은 발신인 확인도 않고 셀폰을 집어 들었다. "헬로?"
"네. 옆에 누가 있어요?" 정애의 음성이었다.
운진은 소파에 기대었던 몸을 일으키며 반사적으로 이층을 돌아다봤다. "아, 아니."
"얘기 좀 해도 될까요, 그럼?"
"뭐요?"
운진은 셀폰을 들여다 봤다. '이 여자, 이게... 무슨 수작을 떨려구! 자존심도 없나!'
"받기 불편하시면 나중에 편하실 때 이 번호로 전화를 주시던지."
"아니. 그 사람은 잔다고 올라갔소."
운진은 순간적으로 지하실을 염두에 두었다. 그러나 지하실은 셀폰 수신이 매우 안 좋다.
그렇다고 전에 숙희가 하던 것처럼 밖에 나가서 받기도 뭐하고...
핸드폰을 밖에서 받는 것들은 하나 같이 불륜이라고 역설한 형록의 말이 생각났다.
그 말이 얼마나 진리인지는 지금의 아내를 보면 안다.
운진은 텔레비젼을 켜 놓은 채 부엌으로 갔다. "얘기하쇼."
그는 일부러 이층을 감시할 수 있는 위치에 앉았다.
"우리 아들이... 한창 사춘기인데... 다루기가 너무 힘들어요."
정애의 음성이 젖어들었다. "말 안 듣는 것 물론이고, 지 누나한테도 욕... 을 하고. 오늘은 드디어 엄마인 저한테까지도... 전화에다 에프 자 들어가는 단어를..."
"몇살인데?" 그의 말두가 짐짓 사회적으로 바뀌었다.
"원래 한국에 있으면 대학 2학년일텐데 여기 와서 한 학기 늦는데다 일년 꿇으니까... 지금 12학년. 한국 나이로 열 아홉이죠. 범띠."
"어유. 띠도 만만치 않네."
운진은 그 말이 불필요했다고 얼른 후회했다. "학교... 성적은 어떤데?"
"공부를 안 해요."
"큰일이네."
"그래서, 겸사겸사, 숙희네 갈 수 있으면, 식사도 하면서 오 선생님이 우리 아들하고 대화를 좀... 애들 말 시켜보시면 대략 아실 수 있잖아요..."
"어유... 글쎄. 내가 무슨 도움이 되겠소..."
운진은 이 여인을 또 불러낼까 충동이 일었다. 아내는 피곤해서 잘테니 성교하고 싶으면 맘대로 하라고 하는데.
제 스스로 용감하게 전화 걸어 온 거라면 나오라 했을 때 얼마든지 나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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