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희는 운진의 눈치를 살피다가 도저히 못 참겠어서 결국 물을 걸 물었다.
"자기... 아빠 집에 가 보자 한 진짜 이유가 뭐야?"
숙희는 그렇게 물으면서 설마 에밀리의 존재에 대해 이 이가 아는 것은 아니겠지 하는 두려움이 앞섰다.
"진짜 이유?"
"새삼스럽게... 아빠의 승락 받으러?"
"당신이 이유야 어쨌든 그 냥반과도 발을 끊고 살길래... 그래도 늦게나마 결혼을 했고, 게다가 아이까지 태어났잖아.... 계속 모른 체 하는 건 도리가 아니지."
"그럼... 자기네 엄니도 뵈러 가?"
"거긴 갈 필요가 없지."
"나중에 무슨 소릴 들을라구."
"무슨 소리 할 게 뭐가 있어... 신경끄시요."
"하긴... 설이를 다시 만나게 된 거가... 신기해."
"만나게 될래니까 그렇게라도 만나는 거지."
"그래서 자기랑 다시 연결된 거잖아."
"그렇게 봐... 준다면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네."
둘은 서로 마음에도 없는 말을 주고받았다.
"설이가 우리 회사에 취직한 것을... 내가 아닌 다른 이가 먼저 발견했지, 아마..."
"다른 한국 여자였든가부지?"
"아니. 일종의 내 비서?"
"와아! 오오!"
운진은 장난으로 놀라는 표정을 지어보이고는 이내 정색했다. "음, 그래서."
"설이가 처음에는... 자기 사진 보여주니까, 죽었다대."
"흐!"
운진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사진이라...?
"내가 그것 갖고 설이와 같이 지내면서도 얼마나 오금을 박았는데."
"그게에... 그 말이... 행여 당신을 만나면 그렇게 말하라 한 것처럼 들리는데."
"아주 대번에 그러던 걸, 뭐. He's dead."
"내가 늘 만일 밖에서 누구든 나에 대해 묻거든, 죽었다 해라, 했더니. 걔가 곧이곧대로 잘 써먹었네."
"오죽 했으면 그런 부탁을 해야 했을까?"
"당시는..."
운진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탁 죽어버렸으면 좋겠다아... 하고 살 때였거든."
"자기 그렇게 안 보이는데, 가끔 말하는 거 듣다 보면, 깜짝깜짝 놀라는 게 한두번이 아니야... 지금 그렇게 말하는 것도... 안 믿겨지구."
정작 운진은 그 집에 간 목적도 있었고, 그 목적한 대로 찾아진 것이 있어도 그냥 돌아왔지만, 만일 그 집에서 에밀리의 사진 쪼가리라도 더 발견되었다면...
그는 그것을 기화로 긍정적인 방향으로 몰고 나가려고 했다.
만일 사진까지 발견되었는데 거짓말이나 발뺌을 하는 상황이 벌어졌더라면...
그는 그것을 기회로 아내 숙희를 완전 거짓말장이 여자로 공표하고 그 자리에서 영영 헤어지려 했다.
그런데 불행 중 다행이랄까, 사진을 보긴 봤는데 이 여자는 불행히 미처 못 본 것 같았다.
"우리는 챌리 앉혀놓고 천륜이 어쩌고 떠들면서..."
운진이 숙희를 흘겨봤다. "그래도 가서 뵙고 오니까 당신 맘이 한결 풀려서 챌리에게 그런 말을 쉽게 해 줄 수 있었지."
"그건 자기 말이 백번 옳지."
숙희가 고개까지 크게 끄떡였다.
숙희는 남편이 더 늦기 전에 한번 찾아뵙자는 말을 처음 꺼냈을 때, 하마터면 자지러질 뻔했다. 아니.
그녀는 발악적으로 반대하고 나설 뻔했다.
그러나 남편의 말을 가로막을 특별한 이유도 못찾았고.
좋은 의도로 찾아뵙자는 뜻을 딱히 부러뜨릴 구실도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남편이 찾아가는 길을 전화로 묻고 난 후, 부친에게 몰래 연락해서 에밀리에 관한 모든 것을 싹 치우라고 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모르는 것 한 가지가 있으니 그가 공희를 언급한 이유이다.
그는 전혀 아무렇지도 않게 공희의 연락번호를 한씨로부터 받았다.
공희는 절대 거짓말을 할 여인이 아니라는 믿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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