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추가 지나고 말복도 지난 햇볕은 닿는 살갗에 따가움을 주어도 그늘에 들면 서늘하다.
이제 화원의 뒷뜰은 듬성듬성 빈 자리들이 보인다.
어디서 불려온 일꾼들은 수확하고 난 마른 줄기들을 거둬 내는 작업을 한다.
숙희는 안채 건물 뒷문을 열었다.
스크린 도어를 통해 시원한 바람이 들어온다.
운진은 아침부터 언덕 너머 과수원 주인과 상의할 것이 있다며 가고 없다.
이제 화원은 남은 화초들과 채소들을 떨이로 팔아치우고 나면... 기나긴 동면에 들어간다.
숙희는 커피를 기울이며 운진이 언제나 돌아오나 기다린다.
두꺼운 나무 문을 통해 매장에서 운서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운진씨는 화원이 동면에 들어가면 뭘 할래나...
이제 다가올 공휴일이라면 레이버 데이.
숙희는 부엌 벽에 걸린 어느 농장제공의 달력을 본다. 한주 남았네.
여름 내 뙤약볕에서 일한 운진인지라 피부가 새까맣게 탔지만 그래도 바닷가는 가야 제 맛이 나는데
나도 핑게 김에 바다 내음도 맡고...
운진은 숙희와 운서가 안채에서 매장 쪽 문을 열어놓고 점심을 먹는데 돌아왔다.
"가던 일을 잘 됐니?" 운서가 물었다.
운진은 암말않고 식탁에 앉기부터 했다.
숙희가 제 딴에는 얼른 일어섰다고 했는데, 운서언니가 더 빨랐다.
운진은 밥 위에다 콩나물 무침부터 척 얹어서 비빈다.
"뭐래?" 운서가 재차 물었다.
"팔 의사가 없나 봐요."
"아버지가 스트로크 맞았대매."
"딸이... 딴 생각이 있나 봐요."
"그럼... 그냥 땅을 내버려 두나?... 아니면 집 같은 것을 지을래나?"
"그런 것 같아요."
"집 지으면... 우린 더 좋겠다."
"만일 디벨로퍼한테 땅을 파는 거면, 저도 팔까요?"
"왜. 화원 이젠 안 하려고?"
"좀 더 변두리로 나가서 더 넓게 할까... 하네요."
"맞어."
운서가 어느 방향을 젓가락으로 가리켰다. "저쪽도 작년에 벌써 집들이 들어섰잖니."
숙희는 남매의 대화를 이리저리 쫓아가며 듣기만 한다.
"왜. 숙희는 잘 자리가 없어질까 봐?" 운서가 웃었다.
"그런 쪽으로 얘기 되어가는 거 아니에요?"
"얘 집 산대." 운서가 운진을 같은 젓가락으로 가리켰다.
"아직은요... 색시나 들어오면..." 운진이 숙희를 슬쩍 봤다.
숙희와 운서의 눈길이 마주쳤다.
매장의 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운진이 총알같이 달려 나갔다. "웨스트파크 널서리?"
과수원에서 에이커 당 이천불씩 달랜다고.
"오백 에어커랬지? 오백 에이커면..."
운서가 대충 암산을 해보려 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딸은 여기를 벗어나려나 보다, 그치?"
숙희는 그들의 대화가 신기하다.
"운진씨 사과 농장 하려구?"
"사과는 그냥 두고요... 복숭아, 매실..."
"와아... 운진씨가 그런 거 할 줄 알어?"
"일이야... 원래부터 일해 오던 사람들을 그냥 인수하는 거죠."
"그럼, 화원 자리는 살아남는 거네?"
"좋아요?"
"순간적으로 아 나 사는 데가 없어지는구나 했다가 아 살아남는구나 하는데."
"그거 큰 약점 같이 들리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