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기로 되어 있는 운명
운진모 김정인은 말로는 딸더러 이 기집애 저 기집애, 아들더러는 죽일 놈 살릴 놈 했지만 남편이 다 주라 하는 호통에 돈이란 돈을 싹 긁어서 아들에게 주었다.
이제부터 우리 먹여 살려, 이놈아! 하면서.
"이제부터 누나가 화원 책임지면, 거기서 생활비 받아 쓰세요."
운진은 시간을 다투어 변호사를 대동하고 과수원 인수 인계에 숙희도 참석시켰다.
숙희는 언덕 위에 위치한 과수원 집 앞뜰에서 끝 없는 벌판을 보고는 기가 질렸다.
거래는 현찰로 주고 받으면서, 반 다운에 나머지를 십년에 나눠서 갚기로 한 것처럼 기막힌 계약을 같은 변호사가 양방을 대표로 해서 서명을 증인했다.
과수원의 사과를 일반인에게 파는 것이 시들어지면, 나머지 사과들은 몽땅 거두어져서 나무통이나 밬스에 담겨 애플 사이다 만드는 곳이나 애플 와인 공장으로 간다.
숙희는 사과들이 통째로 들통에 쏟아지는 것을 보았다.
"내년은 사과를 반은 안 낸대요." 운진의 말이다.
"왜?"
"사과는 건너 뛰는 거래요."
"저절루?"
"녜."
"사과가 저절루 안 열려?"
"그렇대나 봐요."
"허!... 우디, 지금 나한테 사기치지."
숙희가 운진에게 윙크까지 하며 아양을 떤다.
비단 운진이 티 안내는 부자라 그러는 것은 아니다. 그는 어딘가 모르게 계산이 정확하고 계획이 치밀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무엇보다도 그가 하는 일에 그녀를 참여시킨다는 고마움이 더 크다. 그녀는 그의 곁에서 구경만 한다 뿐인데, 그 자리에 참석한 이들이 한결같이 그녀에게 좋은 낯을 보내준다.
세상은 결론적으로 나쁜 사람들만 있는 곳이 아닌 것.
숙희는 이제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도 운진의 어깨에 턱을 고이거나 움직일 때 그의 팔을 꾹 끌어 안아 잡는다.
얼굴 좀 펴시지 하면서.
사과가 나무통에 마치 쓰레기 버리듯 담겨져서 오픈 추렄에 차곡차곡 실린다.
숙희에게 간혹 낯 익은 스패니쉬 남자 일꾼들이 추렄 꼭대기에 아슬하슬하게 올라서서 사과통을을 쌓는데, 마치 요철(凹凸)이라도 있는듯 서로 물리어 성곽처럼 되어간다.
"저게 얼마치야?" 숙희는 궁금해 하던 것을 물었다.
"와인 공장으로 그냥 서비스로 나가요."
"서비스로? 공짜로?"
"안면을 익혀야죠."
"그럼, 운진씨 손해잖아."
"어차피 올햇것은 이 집 사람들이 다 해 먹은 걸요."
"아아... 그래도 너무, 하다..."
숙희는 추렄에 한 가득 실리는 사과가 새삼 아깝다. "반값이라도 받지."
"일년은 손해... 보면서 공부해야죠."
"화원두 언니에게 드리면서..."
"원래는 누님한테 다 드리고, 전 떠나려고 했었잖아요."
"미안..." 숙희는 그의 팔뚝을 가만히 쥐었다 놓았다.
"뭐예요?... 사과밭에 온 김에 하는 사과의 뜻이예요?"
"응."
"체! 인제 사과해요?"
"여태 기회가 없었구... 나도 운진씨를 떠나야 하는 줄 알고..."
"그 때 그냥 확! 할 뻔 했잖아요."
일꾼들이 추렄 짐칸 꼭대기에서 그냥 붕붕 날아 뛰어 내렸다.
숙희가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운진도 웃고, 그들이 웃으며 한데 몰려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