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선이마저 마지막 사람으로 돌아가고 난 후.
운진은 숙희더러 윗층으로 올라가자고 했다. "새로운 데를 발견했어요."
"뭔데?"
"얼른 보면 평생 모를 뻔 했는데. 옥상으로 통하는 비밀계단이 있더라구요."
"비밀계단?"
숙희가 물으면서 그래도 괜히 긴장되는지 운진의 손을 찾아 잡았다.
얼른 보면 옷 같은 것을 걸어 넣는 클로짓 같이 생긴 문이 그 비밀통로라고.
그 안에 또 하나의 문이 있고 그 문을 잡아 당겨서 여니, 좁은 계단이...
계단은 가파른 편이지만 별로 힘 안 들이고 올라갈 수 있었다.
계단 꼭대기의 스톰도어를 밀어서 여니 페인트 칠한 옥상이었다.
이제 해가 넘어간 벌판은 먼 곳에 남은 여광을 힘 입어 얼룩덜룩하다.
운진과 숙희는 과수원 집의 옥상 난간에 기대어 서서 빠르게 어두워져 가는 하늘을 본다.
숙희가 앞에 서고, 운진이 뒤에서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둘렀는데.
"운진씨."
"녜."
"태어나줘서 고마워."
"새삼 고백하시는 겁니까?"
"..."
운진이 목을 빼어 숙희의 얼굴을 찾았다.
그녀의 볼로 비록 어두워져 가는 여광이지만 한줄기 눈물이 흘러 내리는 것이 보였다.
"운진씨가 아빠한테 관대하게 대하는 게 나 때문인 걸 알았거든."
"..."
"그런 사람들은... 비록 내 아빠 아닌 걸로 밝혀진다 치자. 어쨌든, 그런 사람들은 내가 살아가려는 앞길에 큰 지장을... 주지않지. 이제 난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보다 앞으로 더 많은 날들을 살 거거든."
숙희가 운진을 향해 돌아섰다. "미안한 말이지만, 여태까지는 살아온 날들이 후회스럽고 저주스럽고 그랬거든... 적어도 운진씨를 만나기 전까지는."
"..."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내 몸을 지킨 것 밖에. 여고 때부터 아주 친하게 지내던 친구에게 대학 들어가서 만난 선배를 빼앗기고는... 나는 참 무용지물인데 태어났나 보다. 그 때부터 난 절대 남자 안 믿고, 안 사귄다고, 나 자신한테 맹세했는데... 그랬는데. 운진씨를 만나고 나서부터 그 결심이 자꾸 흔들리는 거야."
숙희가 거기서 운진의 가슴께를 툭 쳤다. "하지만 보통 꾼 같지 않으니 절대 조심하자."
"흐... 그 놈의 꾼타령은."
"나한테 슥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밥이나 주쇼."
"고마운데 뭘 보답해얄지 모른다니까요... 그 때 배도 고팠고."
"그렇다고 처녀 혼자 사는 집에다가 밥 달라고 하냐?"
"그럼, 술 달라 해요?"
"술은!... 더 한 거지."
"아하! 숙희씨 술에 약한 걸 그 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걸."
"어쭈?"
숙희가 이젠 풀려서 운진을 때리려고 장난친다.
운진이 도망은 않고 몸만 이리저리 피한다. "술 먹여놓고..."
그녀가 발로 차려고 하면 슬쩍 물러나는 척 하고. "인사불성 됐을 때..."
그녀가 주먹으로 가격하려 하면 손으로 야구공을 잡듯이 해서 방어하고. "내 여자로 확인하..."
그러다가 그는 먼저처럼 방심하거나 속아서 그녀에게 맞지는 않았다.
숙희가 먼저 기권했다.
둘은 다시 앞뒤로 나란히 서서 이제는 깜깜해진 하늘을 봤다.
"우와아!"
그녀의 입에서 탄성이 크게 나왔다. "은하수다, 그치, 운진씨!"
불빛 없는 곳에서 올려다 보는 하늘은 그야말로 수정가루를 쫙 뿌려놓은 듯 그리고 금시라도 별들이 한꺼번에 쏟아질 듯이 은하수가 범람한다.
둘은 그 은하수를 타고 흐르는 착각과 어지러움을 만끽하며 움직일 줄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