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희가 출근 준비를 하려고 방을 나와서 보니 리빙룸에는 운진이 이미 없다.
그녀는 그가 아마 일찍부터 과수원 가서 일 하나 보다고 여겼다.
그녀는 화원 앞을 떠날 때, 과수원으로 한바퀴 돌까 하다가 그냥 떠났다. 만 이틀째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데, 과수원 쪽으로 가기가 싫었다.
운진은 과수원에 가 있지 않았다.
그는 병선과 진희를 만나고 있었다.
운진의 추렄을 점검할 겸 진희부의 정비소에서였다.
정비소 대기실에 세 사람은 마치 죽치는 것처럼 앉았다.
어차피 겨울비가 구질구질 오니 차 봐 달라고 오는 손님도 없다.
운진의 추렄은 네 바퀴가 모두 떼어졌고, 오일 챈지에다 벨트 등도 보는 중이다.
"영진이 집에 전화 안 돼요."
진희가 운진에게 괜히 미안해 하며 하는 말이다. "가게에 따라 나갔는지."
"일단... 들어오게는 했으니까. 도로 나가게는 하지 않겠죠."
"요즘 장사가 너무 안 돼서 아마 못할 걸요... 먼저도 왕복 비행기표가 아니었어요."
"체! 비행기값 갚으라 하면 쥐약이네?" 운진이 병선을 보고 말했다.
"그럴 걸요?" 대답은 진희가 했다.
병선은 사촌형과 강진희를 번갈아 보며 열심히 듣는다. 그러면서 감히 엄두를 내지는 않지만 사촌형이 지금의 여자와 어떻게 되려고 미쓰 김을 관심 두나 하고...
너 해라 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사촌형의 본심과 저의가 의심스럽다.
나 같은 놈은 거들떠 보지도 않게 생겼지만, 성도 좀, 자신을 너무 모르는 거 아냐?
누가 보더라도 지금의 여자하고 미쓰 김하고 어떻게 견주어서...
병선은 어느 덧 자신이 사촌형의 여자를 눈 앞에 그려가며 공상하는 것을 발견한다. 진짜 두 사람이 떨어지면 밑져야 본전 격으로 한번... 아! 아님, 그 여잘 자극 주는 건가?
추렄은 바퀴들이 도로 다 매달리고 바닥에 내려졌다.
"야, 나 간다." 운진이 사촌동생을 툭 치고 일어섰다.
순간, 병선의 머리로 성 어디로 가 하고 물으라는 충동이 스쳤다.
밑져야 본전...
그러나 그의 눈에 띈 변화는 진희가 미간을 찌푸림으로써 수그러들었다.
숙희는 반나절 정도만 회의에 참석하고 화원으로 곧장 퇴근했다.
회사에서 출장 경비를 줄일 목적으로 쑤가 남 캐롤라이나 주로 갈 것을 마치 마지막 통고처럼 권유했는데, 그녀는 속으로만 자존심이 상하고 거부심이 일어났지 겉으로는...
내가 나를 봐도 참...
그들의 제안에 감지덕지해 하던 나.
그녀는 화원에 히터가 안 나오는지 썰렁한 공기를 맞았다. 일단 회사에서 받는 봉급 명세서를 들고 남 캐롤라이나로 가서 방을 얻어야...
그녀는 빠른 시일 내에 남 캐롤라이나 주를 내려가서 이사할 곳을 물색해야 한다.
회사에서는 원 타임으로 이사 비용을 오천불까지 대준다고. 그 돈으로 필요하면 아파트 계약금으로도 쓸 수 있고.
방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모텔에 묵어야 하면 역시 그 돈 한도 내에서 커버해야 하는데.
만일 더 늦어지거나 해서 비용이 초과되면...
일도 못하면서 쌩돈을 물어내야...
그녀는 전근가기로 결정한 최종적인 핑게를 운진의 불투명한 태도라고 미룬다.
그녀는 그의 속마음을 도저히 모르겠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화원에 머무는 것도 이제는 둘 사이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않는다고 단정짓는다.
하다 못해 둘은 장래를 굴뚝 같이 약속하고 아닌 말로 언제 식을 올리자는 계획도 없다.
무의미하게 부모네가 마음을 돌릴 때까지라는 핑게는 시간낭비 같다.
그렇다고 지금쯤 그녀의 마음을 파고 들어와 운진과의 사이를 회의케 하고 다른 기대감을 갖게 해 주는 다른 남자의 출현도 없다.
꼭 꼬집는다면, 하워드의 재접근이 어떤 도화선이 되지도 않았다.
운진이란 남자는 시쳇말로 소유욕도 없으면서 그녀의 몸을 붙잡아 놓고, 그저 꼼짝 못하게 하면 그게 지켜주는 것으로 아는지...
내가 전근을 결심했다 하면 헤어지자 할래나.
숙희는 이미 가방을 꾸리기 시작했다.
이번 기회에 우리 사이를 냉정하게 생각해 보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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