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희는 퇴근 길이 막히면 더 좋다.
늦어지는 만큼 집에 늦게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녀는 점심을 늦게 먹었다는 둥 점심 먹고 속이 안 좋다는 둥 이런저런 핑게를 대며 저녁 밥상에서 식구와 마주 대하기를 회피했다.
한씨는 단 한번도 딸더러 그래도 나와서 국 한술이라도 떠라 하는 말조차 안 한다.
공희가 몇차례 문을 두드려 가며 밥 먹자고 했다가 모친에게 되게 혼나고는 그 다음부터 언니 부르는 것을 더 이상 안 한다.
숙희는 대신 출근하면 아침과 점심을 또박또박 챙긴다.
은행에서 연례행사로 가을이면 어느 일요일을 잡아 전직원 가족들을 위싱톤 메모리얼 파크로 초대한다고.
그 때는 초대인원에 제한이 없다고.
스무명이 와도 되는데 단 혼자는 안 된다고.
수키는 빠지기로 했다.
[메이 비, 다음 번엔...]
수키가 미소로 완강히 대답하니 아무도 말을 더 않는다.
이 날도 숙희는 집에다 특근이라 속이고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너 오늘 몇시에 오는데?" 그녀의 계모가 소리쳤다.
숙희는 놀라서 속으로 뜨끔했지만 시치미를 뗐다. "왜 그러시는데요?"
"엄마가 딸년한테 볼 일이 있어서 몇시에 오느냐면 몇시에 온다고 대답하면 그만이지, 왜 그러느냐고 꼬치꼬치 따져서 뭐 할 건데, 이년아!"
"어머니. 제발 저한테, 그런 욕 좀 하지 마실래요?"
"왜, 이년아! 왜 못해!"
"제발..."
"지랄하고 자빠졌네! 너는 니 출신이나 알어?"
"네?"
"너는 니 출생이나 아느냐고, 이년아!"
숙희는 머리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다녀오겠습니다."
"애비도 족보도 근본도 모르는 년이!"
계모의 그 말과 함께 현관문이 쾅 하고 닫혔다.
숙희는 그녀의 차로 가기까지 몇번이나 까무러칠 뻔 했는지 모른다.
애비도 족보도 모르는 년이라는 욕은 과연 어디까지 용납되는 걸까.
그 말은 그나마 그래도 에미는 안다는 말?
숙희는 이 날이 일요일인 것을 기억했다.
오늘 밤 전화 요금 싼데 엄마가 요금 이리로 물고 전화 좀 안 하나?
그녀는 차의 시동을 걸며 고개를 저었다.
한국에 엄마한테 그딴 걸 물었다가는 초상 치루지.
고모네나 가 보자!
그러나 그녀는 차가 은행으로 가는 것을 알았다.
노는 날 파크에서 모임이 있다더니 은행에는 일요일인데도 누가 있었다.
하워드 마이클스가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문을 열어 잡았다.
주말마다 수키가 혼자 키-퍼슨 일을 해야 하니 추레이닝을 한다고.
[그럼, 메인 체임버에 들어갈 일이 생기면, 누가 들어가죠?] 하는 그녀의 질문은 은행 부사장인 하워드 마이클스에 의해 간단히 해결되었다.
그 날 수키는 수 많은 서류에 일일히 서명해야 했다.
그녀는 토요일에만 세이프티밬스를 고객이 열람하기 원하거나 고액이 지출되어야 할 경우 열쇠로 열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평소의 어떤 제한사항도 그들의 편리를 위해서 필요하면 서슴없이 개방하는 미국인 습성.
수키는 선택없이 그대로 따라야 했다.
그래서 그녀는 딴에는 무리한 요구라고 어떤 조건을 내걸었다.
그가 그녀의 조건을 들으면 행여 기겁을 하고 물러설 줄 알고.
"I want two and a half times for my over time. (나는 내 오버 타임에 두배 반을 원해요.)"
그랬는데 그의 반응이 이랬다. "Absolutely!" 얼마든지 당연하다고.
수키는 되려 어이가 없어졌다. 괜히 속 보였다는 무안감도 들고.
어쨌거나 그녀는 주말을 집에서 안 보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