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란의 남자들
영란은 기가 막혔다.
이젠 남편마저 경어를 쓴다. 딸들과 남편을 합쳐 그들이 경어를 씀으로 해서 무척 멀게 느껴지도록 만든다.
영란은 안간힘으로 붙잡고 있었던 지푸라기를 놓치고 물로 빠지는 연상을 했다. 몸이 뒤로 떨어지는데 한 때 같이 살던 남편이 내려다만 본다. 그의 얼굴이 멀어지면서 영란은 물 속으로 빠졌다.
부릅뜬 눈에 물 표면이 멀어져 갔다. 내가 이래 뵈도 수영에 자신 있었는데!
이쯤이면 물을 잔뜩 먹고 죽어야 하는데 출렁거리는 물 표면이 점점 멀어지고, 영란은 차차 깊은 어두움 속으로 가라앉는 걸 느꼈다.
빛이 닿지 않는 심해로 빠지는 지 눈 앞이 캄캄해졌다...
가게에서 졸도한 영란은 저녁 늦게도 깨어나지 않았고 혈압이 자꾸 내려가 간호사가 계속 맥을 짚었다.
임신부가 악성빈혈에 자궁이 약해 어쩌면 유산할 지 모른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운진은 딸들을 병실에서 내보냈다. 이대로 유산되면 임신부의 생명이 위험하다는 의사의 경고를 되뇌이며 운진은 태아의 생존 확률이 얼마나 되는 지 물었다.
임신 만 사개월째치고는 몸무게도 평균 이하이고 무엇보다도 소나그램으로 읽어본 태아의 이미지가 의사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들었다.
어쨌든 계속 관찰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나서 운진은 병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딸들에게 갔다.
미우니 고우니 해도 엄마는 엄마인지라 딸들은 아빠의 곁에 바짝 붙어 경과를 물었다.
운진은 의사에게서 들은 그대로 반복해서 딸들에게 전해 주었다.
반응은 킴벌리가 빨랐다.
“I think it’s better be miscarried! (난 유산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해!)”
챌리는 속이 상한지 울려고 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엄마가 불쌍해. 무슨 여자 팔자가 저래, 아빠?”
운진은 딸의 물음에 동의도 못하고 반문도 못하고 어설픈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가게를 빨리 가봐야 하는데...’
샌드위치 파는 아줌마한테 술가게를 맡겨놓고 병원으로 영란을 태워왔는데 어느 덧 문 닫을 시간이다.
그렇다고 의사가 언제 부를 지도 모르는데 딸들만 남겨놓고 가게로 갈 수도 없고, 운진은 손목시계만 연신 들여다봤다.
복권 찍은 마감도 해야 하고, 운진은 좀이 쑤셨다.
챌리가 아빠에게 접근했다. "아빠. 가게는요?"
"응, 그래."
운진은 그래도 큰애는 생각이 돌아가는구나 해서 기특한 마음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운진은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제스처로 양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세 사람은 자판기에서 먹을 것과 음료수를 각각 꺼내 휴게실로 갔다.
벽에 붙여서 매어놓은 TV에서는 만화가 한창 돌아가고 있었다. 아마도 아이들도 따라오려니 해서 병원측이 그런 케이블 방송으로 고정시킨 모양이다.
어른들이야 강제로 기다려야 하는 것에 익숙한 체하지만 아이들은 참을성이 결핍되었으므로...
킴벌리와 챌리는 금새 어린아이들로 돌아가 먹고 마시며 TV를 보고 히히거렸다. 아마도 저들도 어려서 본 기억이 나니 서로 동의한다고 그러는 모양이다.
운진은 술 생각이 간절한데 콜라로 목을 추겼다.
한참을 걸려 입맛도 없는데 배나 채우려고 손에 쥔 팝콘을 입에 털어넣고 캔에 들은 콜라를 마지막 방울까지 빨아대는데 어떤 사람이 얼핏 지나치려다가 방향을 돌렸다. “형부?”
여자의 음성이었다.
운진은 깜짝 놀라 소리난 쪽을 봤다.
고운 검정색 코트에 철 이르게 부츠를 신은 영아가 손을 흔들었다. "여기 계셨네?"
“이모!”
"이모!"
두 아이가 앉은 자리에서 용수철처럼 튀어오르며 영아를 반겼다.
그 중 킴벌리는 두 팔을 벌리고 달려가 영아에게 안겼다.
이어 형록이 열쇠로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운진은 형록과 악수를 했다. 할 말도 없고 그냥 고맙다는 눈 인사만 했다.
조카 둘이 오랜만에 보는 이모를 양쪽에서 얼싸안았다.
영아도 오랜만에 보는 조카들에게 헛키쓰 소리를 쪽쪽 냈다.
어떻게 연락 되어 영아와 형록이 여기에 왔나는 중요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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