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두개의 세상 pt.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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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작은 사내의 쉼방 2024. 8. 15. 04:31

   그 날 운진은 실로 오랫만에 술을 거나하게 마셨다. 
그는 술이 오르니 영아에게 거북스러웠던 감정이 가셔지고 자연 말이 많아졌다. 그는 형록에게 영아의 장점들을 강조하기 시작하고 그녀의 칭찬을 많이 했다. 
운진은 그제서야, 그렇게, 영아를 마음 속에서 작별했다. 
영아는 시종 침묵이었다. 
형록은 연신 좋아했다. 
챌리와 킴벌리는 무슨 얘기를 하는지 저들끼리 계속 호호대고 킬킬거렸다.
챌리가 제 앞에 놓였던 소줏잔을 두번에 걸쳐서 비웠다. 그리고 킴벌리가 챌리의 빈 잔을 입에 대고 한방울이라도 떨어지라고 연신 털었다.
형록이 킴벌리가 갖고 까부는 잔에 소주를 부어주었다.

   운진은 아파트로 돌아와서 영아가 운전하는 형록의 밴을 보내고, 두 딸을 어깨동무하고 걸었다. 
어느 새 챌리에게서는 여자 냄새가 풍겼다.
   ‘생리대 냄샌가?’ 아빠란 이는 혼자서 미친 놈처럼 킬킬거리고 웃었다.
챌리가, “왜, 아빠?” 하고, 물었을 때 운진은 웃음을 멎고 헛기침으로 무마했다. 
   “아빠 술 먹으니깐 재밌다아. 아빠 웃기도 하구? 응!” 챌리가 동생에게 말했다.
   “이 아빠 원래 좋은 사람이야. 알어?”
   “알어요. 이모가 말해줬어요.”
   “나한테두!” 킴벌리가 끼어들었다.
운진은 새삼 몰려드는 부끄러움을 떨구려고 고개를 저었다. 
   ‘잊자! 잊어야 한다! 둘의 행복을 위해서 이제부터 아는 척 해서는 안 된다. 이제 가게 봐 달라는 부탁도 해서는 안 된다. 그래야 처제가, 영아가, 형록이의 사랑을 실컷 받는다!’ 
운진은 집 안으로 들어와서 갑자기 몰려드는 외로움을 어찌해 보려고 멜로디도 없이 콧노래를 불렀다. 
예전부터 아는 노래 몇가지를 생각 나는대로 섞어서 흥얼거렸다. 
전화기의 발신자 확인을 뒤져보던 챌리가 말했다. 
   “Mom called. (엄마가 전화했네.)” 
   “You wanna call her back? (그녀한테 전화할 거야?)” 킴벌리가 물었다.
운진은 잠시 생각하다가, “노!” 하고, 짧게 대답했다.
딸 둘이 잠싯동안 마주 보다가, “오케이,” 하고는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운진은 본인은 영란과 통화하고 싶지 않았지만 아이들은 엄마인데 하겠다 하면 말리지 않으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아이들도 맘이 내키지 않는지 제 엄마랑 통화하려는 기색이 전혀 안 보였다. 
   ‘지들도 다 컸는데, 맘 내키는 대로 하겠지, 뭐. 시킨다고 하고 말린다고 안 하나?’
그리고 그는 형록과 영아 같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이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바다와 같은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다...
   운진은 이 늦은 시간에 전화 벨이 울리는 바람에 벌떡 일어났다. 
소파에 누워 잠깐 졸았던 모양이다. "헬로?"
그는 그 사람이다 하고 생각했다.
   "나유."
   "오, 형록아. 응, 웬일이야. 뭐 잊었어?"
   "딴 게 아니구. 애 이름 하나 지어보슈."
   "애 이름?"
   "응. 보이 이름으로."
   "보이?"
   "그러니까, 형님이 만일 아들이 있었다면 어떤 이름을 지었을 것 같수?"
   "전혀 생각 안 해 봤는데?"
   "내일까지 생각해 보슈,"
   "폴(Paul)?"
   "폴?"
   "몰라. 그냥 떠... 오른 게..."
   "폴. 라스트 네임이 좀 후지지만 그냥 쓰지, 뭐."
   "뭔데에!" 운진은 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주무슈!" 형록은 그렇게 통화를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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