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두개의 세상 pt.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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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작은 사내의 쉼방 2024. 7. 28. 03:51

   그날 밤, 영란이 남편의 방으로 내려와서 부부는 실로 몇년 만에 사랑을 불태웠다. 
운진도 마음의 그물을 걷고 아내를 탐했다. 
영란은 오랫만에 하니까 처음 할 때처럼 질이 아프다고 하면서 남편의 가슴을 꼬집었다. 
운진은 그냥 억억하고 웃기만 했다. 
   그는 오션 씨티에서 숙희를 안 만난 게 천만 다행이었다. 만일 만난다면 어떻게 하리라는 계획도 없었다. 조카의 말만 듣고 즉흥적으로 달려간 바다행이었다. 
만일 거기서 숙희랑 만나서 무슨 일이 벌어졌다면 아내는 정말로 큰 일을 저지를 사람이다. 
아무도 그녀를 못말린다. 친정부모도. 동생들도. 남편만 빼고. 
   영란은 남편의 팔을 베고 잠이 들었다. 
운진은 새삼스럽게 아내의 자는 얼굴을 들여다 봤다. 아내의 자는 얼굴이 참 평온해 보였다. 
   ‘그래. 그나마 이 여자를 만났으니 이 정도의 집에서 살지. 관두자. 숙희 생각은...’ 
운진은 팔을 굽혀 아내의 머리가 더 가까이 오게 했다. 
그러자 영란이 더 바짝 달라 붙었다. 
   숙희는 성격이 우유부단하면서 변덕스럽다면 영란은 애교스러우면서 괴팍하다. 그러나 영란이 숙희에 비해 한가지 더 다른 점은 소위 곤조가 있다. 그 말은 숙희는 애교는 없지만 뒤끝이 없다는 뜻이다.

   이튿날 아침 일찍 숙희는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인사과의 다른 직원에게 조회해 본 결과 설이는 누구의 추천을 받고 입사한 것이 아니었다. 대학 졸업 후 어디를 한 2년 다니다가 신문에 난 구인광고를 보고 찾아 온 것이라는 써니의 간단한 설명을 매리앤에게서 추가로 듣고, 숙희는 지레 짐작으로 무슨 모략이 있을까 하고 상상했던 자신이 우스워졌다. 
리빙룸 소파에 앉아 비가 쏟아지는 창밖을 내다보며, 숙희는 커핏잔을 기울였다.  
   ‘어쨌거나 오션 씨티는 안 가길 더욱 잘 했네. 이런 날씨에...’
   발등까지 내려오는 홈웨어에 얇은 스웨터를 걸치고 커핏잔을 기울이는 그녀의 모습은 우아하다. 마흔여덟살이지만 아이를 전혀 낳아보지 않은 몸매는 지금도 날씬하다. 
벽시계를 올려다보고 그녀는 소스라쳐 일어섰다. 
   조카아이의 첫등교하는 날인데 깜빡 잊고 늦장을 부렸다.

   삼십분 후, 숙희는 조카가 다니는 엘레멘터리 학교에 도착했다. 
비도 오는데 학교 주차장은 차들로 빈 틈이 없고 주위의 주택가도 차들이 즐비했다. 
옅은 연두색의 트렌치코트를 받쳐입은 그녀는 빨간 우산을 쓰고 학교로 들어갔다. 
5학년은 세번째 골목인 C윙(Wing)이라는 안내를 받고, 그녀는 깨끗이 정돈된 복도를 하이힐 굽소리도 경쾌히 걸었다. 복도에 여기저기를 다니거나 서 있는 사람들이 숙희를 흘끔흘끔 훔쳐봤다. 
동양여자이지만 키가 훤칠하고 화사한 차림에 걷는 자세도 꼿꼿한 숙희를 부러워 하는 눈초리들이었다. 
   여름 방학 후 수업 첫날을 참관하러 온 학부형들은 제법 많았다.
조카의 교실은 그 복도의 끝방이었다. 
숙희가 그 방을 들여다 보는데 출석을 부르는지 여자의 목소리가, “쥰(June)?”하고 났다. 
   쥰은 정아의 미국 이름이다. 
곧 이어 아이의 “I’m here! (여기 있어요!)” 하는 똘똘한 음성이 들렸다. 
숙희와 조카의 눈이 마주쳤다. 
아이가 입으로만, ‘하이 이모!’ 하고 아는 척을 했다. 
숙희는 손을 흔들어 아는 척을 해 주며 아이의 옷을 살펴봤다. 짙은 보라색으로 아래 위를 입혔는데 어깨와 소매가 옅은 체크 무늬가 들어 있는 셔츠에 아랫도리는 짝 달라붙는 슬랙스였다. 
숙희는 고개를 저었다. 
   ‘공희 걔는 왜 저리 애 옷을 제대로 못 입힐까? 에이, 올해도 내가 골라줄걸!’
게다가 아이의 머리가 단발이다. 지난 해에는 이모가 조카를 직접 최고급 미장원에 데려가서 굵은 파마를 시켜줬었다. 가방도 살펴보니 작년것 그대로다. 
숙희는 교실을 살그머니 빠져나와 바깥 복도의 구석 쪽으로 가며 백 속에서 모토롤라 추랰트 셀폰을 꺼냈다. 모토롤라 폰이면 보는 이들이 우와! 하는 그런 모델이다.
   그녀는 공희에게 전화를 하고 다짜꼬짜, “돈 얼마 남았니!” 하고, 화가 난 음성으로 물었다. 
동생은 우물쭈물하며 대답을 얼른 안 하다가 언니의 두번째 다그침을 받고서야, “사실은 엄마가 돈이 필요하다 해서. 언니, 미안해.” 하며, 말끝을 흐렸다.
   숙희는 그럴 줄 알았다며 셀폰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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