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두개의 세상 pt.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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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작은 사내의 쉼방 2024. 7. 29. 01:23

   그 후 운진은 번민에 빠진 사람처럼 숙희의 말에 계속 딴 소리만 했다. 
그걸 숙희는 재미있어 했다.
아까부터 이쪽을 자꾸 훔쳐보던 정(鄭)이란 자가 기여코 옆에 옮겨 와서 숙희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운진은 정에게도 꿀린다. 
정은 예일인가를 나와 그 때 이미 회계일을 시작했고, 딸을 가진 제법 괜찮은 집들에서 군침을 삼키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그는 뒤로 듣기에 여자 문제가 지저분했다. 
운진은 저는 숙희와 안 되더라도 정가도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그를 무안줘서 보냈다. 
   “왜 사람을 무안주고 그래요? 그거 아주 안 좋은 습성이예요, 운진씨.”
   “저기요...” 
   운진은 목소리를 낮췄다. “저 사람은 평이 안 좋아요. 그래서.”
   “운진씨!”
   “녜.”
   “그건 나를 바보로 취급하는 건 줄은 아시죠?”
   “어어... 그런 뜻은 아닌데요. 잘못 말했어요.”
숙희는 운진을 찬찬히 뜯어봤다. 모자라는 사람도 아니고 성질께나 있게 보이는데 의외로 부드럽다. 
그걸 이중성격으로 보기는 어렵다. 눌려 산 사람인가? 
아니면, 진짜 무서운 성질을 감추고 사는 사람인가? 
아니면, 이런 수법으로 여자들이 쉽게 접근하도록 만든 다음 본색을 드러내는 꾼인가?
   버스가 산으로 올라가기 시작하면서 사방의 단풍 절경이 펼쳐졌다. 
차 안의 모든 사람들이 한결 같이들 와아 우우 하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씨닉 에어리아 마다 버스가 섰다. 
청년회 회장이 제딴에는 인심을 쓰는 모양인데, 운진은 자꾸 시계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러다가는 동굴 구경을 못 하는데...'

   그 날, 일행은 스카이라인을 먼저 돌고 어둑해진 후에야 루레이 동굴을 찾았다. 
루레이 동굴은 버지니아주의 한 거대한 천연 석회 동굴인데 특히 가을철이면 관광객들이 더욱 찾는 곳이다. 동굴 구경과 단풍 구경이 한 세트로 심지어 관광회사도 다투어 내놓는 상품일 정도...
성렬은 운진이 애초에 말한 코스와 정반대로 돈 셈이었다. 
동굴은 이미 마감 시간이 지나 닫힌 후였다. 
따라서 거기에 딸린 자동차 박물관은 물론이고 거기에 딸린 식당도 닫았다.
그제서야 사람들이 청년회 회장을 나무라기 시작했다. 전도사도 성렬을 꾸짖었다. 
어두워져 가는 동굴 앞 주차장은 구경 다니는 차가 한대도 없이 썰렁했다. 하늘을 찌를듯 치솟은 나무들의 그림자가 텅빈 아스팔트 위에 길게 길게 줄을 그었다. 그 앞길은 차들이 씽씽 달려 지나갔다.
그리고 사방은 빠르게 어두워져 갔다...

   청년회 회장에게 화가 몹시 난 전도사 양반이 교회로 돌아가는 나머지 길을 운진으로 하여금 운전하라고 지시했다. 그 양반은 성렬이 애초에 운진의 말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코스를 택한 바람에 어렵사리 나온 가을소풍을 망쳤다고 나무랐다.
   "미스터 오가 동굴부터 보자 안 했나?"
전도사의 그 말에 주차장에 모여 선 이들이 조용했다.
   "그래도 스카인라인 구경은 잘 했는데..." 
운진이 그런 쓸데없는 말을 덧붙이려는 것을 숙희가 그의 팔꿈치를 가만히 만짐으로써 중지시켰다.
일행들이 버스에 올라탔다.
숙희는 무언 중에 앞자리에 앉혀졌다.
교회로 돌아가는 차 안은 의외로 조용했다. 어떤 사람은 카세트 테잎을 이어폰에 꽂은 채 잠이 든 모습이고, 여성 회원들은 서로 마주 보고 속닥거렸다.
전도사 양반만 여러 청년에게 현실의 어려움을 성서내용과 비교하며 열심히 연설했다.
숙희는 앞에 나타나는 길이 번잡할 때마다 운진이 제대로 알고 가는 것인지 궁금해서 그를 보곤 했다. "맞게 가는 거예요?"
운진은 입을 꾹 다문 채 앞만 보고 운전하다가 숙희가 보는 기색이면 눈만 돌려서 확인하고 싱긋 웃으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맞게 가요."
   '운전을 참하게 하는 걸 보면 성격은 차분한가 보다...' 
   숙희는 새삼 그에 대해 배웠다. '내가 미스타 황에게 한 거 나중에 흉보겠다.'
황은 완전 시무룩해져서 시종일관 침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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