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의 가을
숙희는 운진과의 데이트가 비록 짧았었지만, 그를 처음 만났을 때가 늘 기억에 또렸했다.
날짜까지도 정확히 기억할 수 있고.
그녀는 그래서 비만 오면 그가 생각났다.
또 그와 데이트하며 같이 사 먹은 음식이 꽤 많았어도 그 때 그가 양보한 그 짬뽕의 맛이 지금도 입에 남아있다.
‘왜 나를 찾으려 하지 않았을까? 얼마를 기다리다가 다른 여자와 짝을 맺은 거야. 난 지금도 기다리는데. 나를 그렇게 몰라.’
그녀가 만일 운진 그를 정확히 이해한다면, 그는 아마도 숙희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고,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도전하는 그런 과정을 힘겨워할까 봐 그랬는 지도 모르겠다.
그는 만나던 동안에도 숙희가 힘들어 하는 것을 볼 때마다 나중에는 집에서도 좋아하고 더 나은 장래를 보장할 수 있는 남자를 찾아가라고 종종 말했었다.
사실 그의 그런 양보와 친절이 그녀의 마음을 더 아프게 했는데.
집에서 결혼하라고 강요하던 남자와는 죽어도 못 하겠었어서였는데.
숙희는 생각에 잠겨 운전하다 보니 숫제 방향 감각도 시간 관념도 없어졌다. 아무런 의식없이 차만 못살게 굴며 이리저리 다니다 보니 기름 탱크가 비었다고 불이 딩 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조카의 학교를 떠나 나온 게 아침이었는데 어느 새 가로등들이 들어왔고, 자신의 차는 밤하늘이 낮게 찌푸린 오션 씨티에 와 있다.
그러고 보니 긴 다리를 건너며 돈을 준 기억이 난다.
얼마를 주었는 지는 기억이 없다.
‘맞게 줬겠지... 그러니까 다리를 건넜지.’
그녀는 톨게이트 수금원에게 요금의 몇배 되는 지전을 그냥 던져주고 그냥 지나온 것을 기억 못 한다.
비가 그친 바닷가는 바람이 심하게 불고 몇 군데 상가들의 휘장이 찢겨져 날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바닷가는 이미 철시한 뒤였다. 태풍 덕에 바닷가의 여름이 더 일찍 끝난 것이었다. 게다가 불들도 안 켰으니 구경하는 눈에 무서움이 몰려왔다.
숙희는 차를 돌려 기억에 있는 해산물 레스토랑으로 갔다. 주차장을 들어서는데 차가 한 대도 없다.
엉? 하고 둘러보니 출입문을 비롯해서 사방 유리창들이 베니아판으로 몽땅 가려져 있다.
그러고 보니 사방의 상가가 몽땅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길에는 경찰차만 드문드문 다닌다.
여기도 외로움이 밀려든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발 디딜틈 없이 여름철 행락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을 시가지가 문자 그대로 텅 비었다.
태풍 때문에 철시하고는 그대로 방치한 모양.
숙희는 아무 간판도 안 보고 처음 나타난 주유소로 차를 몰았다. 밤의 주유소도 한산했다.
그녀는 철시한 바닷가 시가지에서 혼자라는 두려움에 휘발유를 조금만 넣고 달아나 나왔다.
오션 씨티에서 나오는 길은 여름철 한창 때는 아예 주차장처럼 차들이 밀리는데, 숙희는 이 날 역시 텅 빈 도로를 달려서 두시간 만에 집에 즉 칸도에 도착했다.
그녀는 습관처럼 앤서링을 점검하려다가 꺼져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내버려 두기로 했다. 만일 회사에시 급한 연락을 취하려는데 집 전화로 응답을 안 하면 곧바로 셀폰을 울리게 한다. 그러므로 그녀는 전화기를 계속 꺼놓기로 했고, 사실 도로 켜기가 귀찮았다.
그녀가 소파에 구기고 앉아 영화 한편을 죽이고 나서 벽시계를 올려다 보니 어느 덧 새로 한시다.
숙희는 리빙룸의 불을 켜둔 채로 소파에서 몸을 움직였다.
그녀는 이 날따라 불을 끄기 싫었다.
휴가 받은지 나흘째, 아무 것도 안 하고 아무 데도 안 가고... 아니.
정신을 놓고 오션 씨티까지 한바퀴 돌고 왔을 뿐 집안에서만 죽 치니 몸이 되려 무겁고 찌뿌두하다.
‘그냥 내일부터 출근할까? 휴가 반납하고?’
그녀는 집안 전체의 에어콘을 껐다. 그녀는 침실로 들어 얇은 잠옷으로 갈아 입었다.
그녀는 나이 사십을 넘겼지만. 아니.
이제 사십팔년을 꽉 채웠지만 몸매가 여느 젊은 여자 못지않게 아직도 늘씬하다.
그녀는 침대에 들어 머리맡의 조그만 등을 켜고 천장의 불빛 무늬를 올려다봤다.
이상하다. 혼자 살아오는 것에 익숙하고, 전혀 불편함을 모른다고 여겼는데, 그리고 침대에만 들면 금방 잠드는 체질인데, 이 날따라 정신이 맑아져 온다.
'혼자 사는 여인네의 가을은 이런가? 후후후. 내가 혼자 사는 게 하루 이틀이야?'
그나저나 운진이란 남자를 이제라도 찾아내서 흠씬 두들겨 줄까?
그나저나 누가 물으면 죽었다 하라 한 속셈이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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